비스마르크처럼 슬기로워지기
비스마르크처럼 슬기로워지기
  • 박숙희<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6.05.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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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직지' 상권 열 여 덜 번째 이야기는 남악 회양 화상(南岳懷讓和尙)의 또 다른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각성 스님의 ‘직지’ 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남악 회양 화상이 마조가 좌선을 많이 익히는 것을 인하여 어느 날에 벽돌을 가지고 암자 앞에서 갈고 있으니 마조가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만들려고 합니까” 남악 회양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가 다시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남악 회양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벽돌을 갈아서 이미 거울이 되지 않는다면 좌선함에 어찌 성불함을 얻겠는갚 마조가 묻기를 “어떻게 해야 곧 옳습니까” 남악 회양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비유컨대 소가 수레를 끌고 감에 수레가 만약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곧 옳을 것이냐, 수레를 때려야 곧 옳을 것이냐”

마조는 남악 회양 화상의 상수제자란다. 마조 스님은 남악 회양 화상에게 법을 받기 전에 좌선을 주로 했단다. 그래서 남악 회양 화상께서 마조를 그냥 섣불리 다루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런 수단을 쓰신 것이란다.

남악 회양 화상이 마조와 통성명도 하지 않고 마조를 만나려고 할 때 암자 앞에서 그 벽돌 두 개를 갈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 날을 두고 갈고 있으니까 무슨 영문인가 해서 마조가 물었다는 것이다.

마전작경(磨塼作鏡)이란 말은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는 것은 안 되는 짓이라는 것. 이것은 마조의 좌선이 쓸데없이 공연한 짓이라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겠다. 이는 거울 바탕이라야 거울이 되는 것이지 거울 바탕이 아닌 벽돌을 가지고 거울을 만들 수 없다는 것.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좌선하여 성불하려는 것이 똑같다는 것 아닐는지.

수레가 가지 않을 경우에는 소를 때려야 수레가 가지 수레를 때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수레는 몸을 비유한 것이고 소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겠다. 몸을 구속해서 좌선한다고 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 마음을 깨우쳐야 되는 것이겠다.

19세기 후반에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비스마르크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사냥을 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친구가 늪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단다. 마침 사냥에 사용할 총을 가지고 있어서 친구에게 내밀어 붙잡고 나오도록 하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총이 닿지 않았단다. 주위엔 친구를 도와줄 밧줄도 없었단다. 여러분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는지?

비스마르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갑자기 총구를 친구에게 겨누면서 “자네가 늪에빠지게 되면 숨이 막히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네. 내가 이 총으로 쏴 죽여서 고통을 줄여주겠네”

그러나 그 친구는 죽을힘을 다해 총구를 피하면서 결국 늪에서 빠져나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눴던 비스마르크에게 앙갚음하려 하자 비스마르크는 침착하게 “내가만약 자네를 쏘려 하지 않았다면 자네는 결국 늪에 빠져 죽어서 시체도 찾지 못했을 것이네. 내가 총구를 겨눈 것은 자네가 아니라 사실은 포기하려 하는 자네의 나약함이었다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이는 남악 회양 화상말씀 “몸을 구속해서 좌선한다고 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 이처럼 비스마르크는 사람이 아주 심한 분노를 느끼면 복수심에 불타 평소에 보이지 못하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 즉 행동보다 아는 것이 더 먼저라고 생각한 비스마르크의 슬기로움이 아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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