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놓은 듯이
수놓은 듯이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05.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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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수필가>

온 천지가 꽃밭이더니 어느새 신록이 한창이다.

꽃과 잎들은 대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토록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일까? 매년 맞이하는 봄이건만 온 세상을 송두리째 탈바꿈시키는 자연의 위대한 힘이 신비롭기만 하다.

지는 봄을 아쉬워하며 나는 지금 다시 꽃을 피우고 있다. 방금 조팝꽃 하나가 내 손에 의해 어렵사리 피어났다. 네다섯 개의 꽃잎들이 모여 작은 꽃 한 송이가 되고, 그 작은 꽃들이 또 모이고 모여서 한참만에야 나뭇가지에 탐스럽게 달린 꽃 송아리가 되었다. 다양한 모양의 이파리도 사이사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아직은 서툰 솜씨로 수놓은 야생화 자수다.

몇 해 전 매체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된 바람꽃 자수로부터 꽃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갈색 천에 흰 홀아비바람꽃을 단순화한 작품인데 단정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평생 수를 놓으며 살고 싶다는 뜨거운 바람이 생겼다. 작은 꽃들과 교감하면서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다. 나만의 도안을 만들어 수를 놓는 그 시간만큼은 무아지경이 되어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세등등하게 덤벼들어 수를 배우자마자 높다란 벽이 나를 가로막아 섰다. 수를 놓으면 놓을수록 내가 보여 주려는 대상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나뭇잎 하나 꽃잎 하나조차도 찌그러지고 삐뚤어질 뿐 제대로 놓아지지 않았다. 수놓은 듯이 아름답다는 흔한 표현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를 그때 알았다. 기껏 놓은 수를 다시 풀기를 여러 번…. 그나마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을 눈앞에 둔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자꾸 잘못 놓은 부분만 눈에 거슬려 급기야 바늘도 뽑지 않은 채 둘둘 말아 밀쳐놓기에 이르렀다.

수를 잊고 지내던 지난해 가을이었다.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이때껏 수놓은 듯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모든 나뭇잎들은 끝이 마르거나 떨어져 나가 온전한 것이 없었다. 비바람을 맞고 뜨거운 햇볕을 견디느라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단풍은 여전히 수놓은 듯이 아름다웠다. 잠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려야 했을 작은 잎들이 그 순간 장해 보였다.

내 무릎 위에 조팝꽃이 흐드러졌다. 얼핏 보면 전문가의 작품처럼 근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뚤배뚤 엉망이다. 조급한 마음에 엄벙덤벙 마무리 한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애써 놓은 수를 풀지 않는다.

꽃수를 놓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급히 저녁밥을 짓다가 한 땀,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한 땀, 누군가를 걱정하며 한 땀, 늦은 밤 남편을 기다리면서 한 땀. 한 마 남짓한 천에 내 삶이 수 놓여 있다. 허청거리던 흔적조차 이젠 모두 소중하다.

한바탕 꿈같은 봄의 끝자락이다. 그 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되리라 기대했으나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은 채 산다. 그래도 괜찮다. 그 중 몇 송이는 아직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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