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기억, 저무는 5월
소년의 기억, 저무는 5월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5.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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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어서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은 스르륵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모질게 되살아난다. 두 눈 부릅뜨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다시는 그런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만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다짐도 흐르는 세월과 직접적 관련성 여부에 따라 희미해지는 것 또한 기억의 안타까운 한계가 된다.

어언 36년이 지났으니 기억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제 치하 36년이 온 나라와 백성에 여전히 고스란히 남기고 있는 깊은 상처의 잔재와 모순을 생각하면 변명이 아닐 수 없다.

5·18 기념일이 지났다고, <님을 위한 행진곡>이 끝내 제창되지 않았고, 그런 옹졸함으로 인해 협치가 물 건너갔느니 어쨌느니 하는 호들갑도 모두다 그때뿐. 5월의 서러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은, 그리하여 쓰고 싶은 것도 많은 5월이다.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이야기와 ‘의심’이라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다룬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도 의미심장하게 살펴볼 일이다. 게다가 ‘여성혐오’와 ‘묻지마 살인’이라는 빗나간 화살로 서로 대립 갈등하고 있는 서울 강남의 20대 여성 피해자의 비극도 허투루 넘길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36년 전 5월 18일은 시작에 불과할 뿐, 그 해 5월 27일 새벽 2시, 2만5천명 게엄군의 잔혹한 진입은, 그날 이후 제사상을 차려야 하는 남아있는 이들의 여전히 뚜렷한 공포이며 살아있는 비극의 현재진행형이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컴컴한 창문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소설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5월 27일 전야의 어둠과 고요는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려는 빛도, 소리도 없는 통곡이 아니겠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부로 옥조여오는 죽음에 대한 폭거. 정권을 차지하기 위함 외에는 아무런 명분도 없는 ‘죽음의 굿판’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니 독재에 항거하며 너무도 뻔한 죽음의 예고에도 도망치지 못한 소년을 기억하려는 안간힘도 부질없다.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폭도’로 내몰리는 불명예와 북한 간첩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영원히 그 이름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그 해 5월, 광주의 도청 하늘은 알지 못했으리라.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살아있음과 죽음의 엄청난 경계에서,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쳐들어오는 잔혹한 순간순간이 얼마나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일이었을까를 미루어 살펴볼 수는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로 반문하는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우리에게 기억의 숭고함을 말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는 그때 없었다. 오로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러야 했던 5월의 순수. 그 비극적 고통의 기억을 따라 소년이 되살아나야 하는, 5월이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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