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재다능과 기회 독과점
다재다능과 기회 독과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5.2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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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조영남씨는 본업인 가수 외에도 화가, 작가, 칼럼니스트, 방송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를, 그것도 나름의 일가를 이루며 섭렵한 ‘멀티테이너’로 통한다. 70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요즘도 전국 곳곳에서 콘서트를 열고 방송에도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며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그림 대작(代作) 파문에 휩싸였다.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던 화투 그림 수백점이 고용된 무명화가가 대신 그린 작품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의뢰받은대로 작품의 90% 이상을 그려주면 조씨가 그 위에 약간 덧칠을 하고 사인을 해서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이 대작 사실을 폭로한 조수의 주장이다. 조씨는 도움을 받은 것은 맞지만 아이디어와 콘셉트 제공, 작업 마무리를 자신이 한 만큼 대작 혐의를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이같은 제작방식은 미술계의 오랜 관행이라고 반박했다.

화단과 평론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조씨를 변호하는 측은 독창적인 개념과 아이디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로 평가돼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목수와 벽돌공 등 여러 사람이 집을 짓지만 결국 그 집은 아이디어를 낸 건축가의 작품이 되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직접 조수들을 감독하며 진행하는 것이 협업이지, 하청을 주듯 작품을 맡기고 납품받는 행위는 협업도 미술계 관행도 아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물리적 작업이 수반되는 조각이나 벽화, 반복작업이 필요한 판화와 달리 일반 회화에서 화가가 조수의 조력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며 일반적 관행으로 몰아붙인 것은 경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작품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는 예술행위의 범주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는 논란은 나 같은 미술 문외한이 끼어들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공공연했다는 관행이 마치 꽁꽁 숨겨온 치부를 드러내듯 폭로의 방식으로 밝혀진 점은 석연찮다. 더욱이 구매자 대부분은 이같은 ‘미술계의 관행에 무지한’ 상태에서 조씨의 작품을 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찰이 사기죄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나섰지만 미술계의 입장은 작가가 그같은 협업 사실을 사전 공지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조씨의 단독 작업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소비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벌어지는 그들만의 논박에서는 오만이 읽혀진다.

예술이 ‘관행’이라는 퇴행적 언어와 이렇게 친숙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는 학계의 고질적 관행으로 꼽히는 논문 대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게 된다. 교수가 논문의 포맷과 방향을 짚어주고 조교나 제자가 썼다면 그 논문은 교수의 논문이 된다. 관행인데다 대신 논문을 쓴 조교는 교수가 시킨대로 자료를 찾고 정리·분석해 글로 옮긴 필경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갑을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도 엿보인다. 조수는 그림을 대신 그려준 값으로 재료비 수준에 불과한 10만~ 2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조영남의 그림값을 감안할 때 착취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 나와 예술인의 품격을 말하기도 했던 그가 초췌해지는 대목이다.

더 씁쓸한 것은 일자리 없는 청년들이 거리를 헤매고 은퇴세대들이 생계를 위해 구직박람회를 전전하는 시절 한편에선 기회의 독과점이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조영남은 고정 프로그램까지 갖고 있는 방송인에 10여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미술입문서에서 음악비평, 시 해설 등 저작 공간도 다양하다. 대중음악, 그림, 방송, 저작 등 그가 섭렵한 분야는 극소수의 도전자들만 성취가 허용되는 ‘레드오션’이다. 이런 분야를 두루 주유하며 전능의 경지에 올랐으니 그의 독보적 다재다능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는 열정넘치는 인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화가를 고용해 그림을 대량 생산하면서 열정을 과욕으로 변질시켰고 급기야 사기범으로 몰릴 위기까지 자초했다. 연예인 중 가장 비싼 집에 살고 있다는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분투하고도 스스로를 시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낙오한 숱한 인생들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시장 밖에서 멈추게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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