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4)
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4)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5.22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순교자 남상교와 처 이소사, 장자 남명희 등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성소터인 남상교 유택지는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에 소재한 곳으로 ‘학산공소 묘재성지’로도 불린다.

묘재란 이 지역 자연부락 명칭으로, 조살미라는 산 중턱에 묘 2기가 있어 이곳을 오가던 선비와 문인들에 의해 묘재로 불렸다고 하는데 남상교는 신앙에만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병인박해 때 아들인 남종삼(요한)의 뒤를 이어 체포되고 공주감영(公州監營)으로 압송되어 83세 고령으로 옥문(獄門)에서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덕분에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는 직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특히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하게 되는데 그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해 왔다.

남종삼은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어한다는 것으로 러시아 세력을 프랑스 세력으로 막아낸다는 대책인 “이이제이방아책(以夷制夷防俄策)”을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하게 된다.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지만 당시 프랑스인 주교와 부주교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어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하게 된다.

남종삼은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린 후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교를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가던 중 고양군 축베더리 마을이라는 곳에서 붙잡히고 의금부로 끌려가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게 된다.

1968년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성인품(聖人品)에 올라 한국의 103위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1,087m)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舟論)이라 불린 이곳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나간 교우촌이다.

참된 것이 무엇인지 알려 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일생동안 혼신을 다했던 신앙의 선조들과 그 얼이 담겨 있는 곳이다.

발전과 편리만을 추구하며 흔들리는 가치관 때문에 갈등을 겪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작은 것에도 쉽게 굴복하며 세상과 타협하는 우리에게 배론이 주는 의미는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로 증거한 모습 속에서 나의 삶의 철학이나 소신을 찾아보고 가슴에 새겨야 할 하나쯤은 꼭 만들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