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판의 야생화처럼
저 들판의 야생화처럼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05.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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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방향을 잃은 바람이 미친 듯 세상을 휘젓고 있다. 바람도 세상을 따라가는 것인가. 이제 땅 내를 맡기 시작한 여린 고추 모들이 밤사이 모두 누워 버렸다. 유난히 웃자란 모 중에는 이내 꺾인 것도 있다. 얼마 전 장에서 사다 심은 모종들이다. 넓지 않은 뒤란 텃밭에 고추 모 스무 포기 남짓을 심어놨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된바람이 밤새 힘자랑을 한 모양이다. 뉴스에서는 아침부터 농가의 하우스가 날아가고 조립식 지붕이 날아가고 도시의 광고판이 떨어져 행인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는 소식으로 왕왕이고 있다.

평온하기만 했을 하우스 생활에서 갑자기 만난 바람은 어린 모종들이 이겨내야 할 세상과의 첫 대면식이었을 것이다. 어디 살아가는 데 있어 방해꾼이 바람만 있을까. 뜨거운 태양도 이겨내야 할 것이고, 목이 타들어 갈 만큼의 가뭄도 거쳐 가야 할 터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다를 바 없다. 아이가 엄마 뱃속을 나오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이가 겪으면서 터득해야 할 일투성이다. 아이는 순간순간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주 기본적인 일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삼밭 일을 다니시느라 동도 트기 전에 나가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에 남아 있는 우리 4남매는 제일 큰 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학교도 가고 청소며, 빨래, 소죽 쑤기, 소 꼴 베기 등 집안일 등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도 해냈다. 힘도 들었을 테지만 우리는 투정도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니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의 모습도 바뀌고 자식들 또한 부모에게 바라는 것 또한 달라지고 있다.

요즘 자식들에게 극성인 부모들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몸살을 앓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참견하며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을 일컫는 ‘헬리콥터 부모’들은 아이들의 공부며, 친구관계 등 모든 것을 자신들이 참견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이제는 ‘헬리콥터 부모’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그들의 새로운 무대는 ‘대학·군대·회사’이다.

지난해 말부터 군부대에는 내무반마다 휴대전화를 보급해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군에서 빈번하게 사건·사고가 발생하자 부모들의 불안을 덜고자 마련한 조치일 것이다.

군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자식의 소식을 묻는 부모들로 인해 군 간부들의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랑의 방식은 정말 많이 변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자살을 하고 패륜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 조금만 힘에 부쳐도 포기하고, 될 수 있으면 쉽고, 편한 것만 좇아가려는 우리들의 아이들. 세상은 하우스 안이 아니다. 거센 바람과 뜨거운 태양빛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있는 곳, 그곳이 아이들이 부딪히며 살아갈 세상이다. 이제 아이들 스스로 하우스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어떨까. 저 들판의 야생화가 낮은 모습으로 느리지만 강하게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해가 진다. 동네 모든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자늑자늑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도록 뛰어놀다가도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소리에 뛰어가던 그때가 나는, 마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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