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산성의 전형 상당산성에 오르다
가장 한국적인 산성의 전형 상당산성에 오르다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5.18 1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신라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이 쌓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상당산성은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가장 한국적인 산성의 전형 이라고 평가되는 상당산성은 김유신 장군이 5,000명의 고구려군을 물리쳤다는 낭비성으로 보기도 한다. ‘상당’이라는 지명은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백제 때 청주의 옛 이름이다. 그 후 지명은 통일신라 때 서원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부터 청주로 부르게 되었다.

상당산성은 산의 정상 가까이에서 시작해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산등성이를 타고 구불구불하게 화강암으로 성벽을 쌓았다. 3∼4m에 이르는 성벽이 4.2㎞로 그 모양이 잘 남아 있는데,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서쪽을 방어하고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 15개의 포루터가 있으며, 성안에는 식수로 이용하고자 2곳의 연못이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1592년 부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에게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조선은 한양을 빼앗긴다. 불과 17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조정은 전쟁이 끝난 후 한양을 지키고자 남한산성을 새로이 고쳐 쌓았다. 그리고 경기도에 이르기 직전에 있는 상당산성을 새로이 고쳐 쌓고자 하였다. 이때 부역의 폐단이 심해 그 대책이 논의된 적이 있었으나 사실 상당산성을 새로 고쳐 쌓는 일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 병사 원균에 의해서이다.

상당산성이 다시 역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 강경파가 일으킨 이 반란 사건으로 청주 지역은 커다란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반란군이 청주읍성에 난입하여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을 살해하고 곧바로 상당산성을 점령한 것이다. 상당산성은 청주읍성과 함께 충청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대단했다. 반란군에게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주고 적극 협력했던 인물이 장덕부인데, 산성의 동암문과 성벽에 글자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아마도 상당산성을 새로 고쳐 쌓는 일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산성이 이인좌 등의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고 유린당하였음에도 영조는 상당산성을 새로 쌓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당산성이 갖는 국방상의 전략적인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점과 다른 하나의 이유는 자신의 태가 묻힌 곳이 바로 상당산성 밖의 낭성면 무성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산성은 양란 이후 팽배하였던 국방의 기운이 점차 약화하면서 성곽의 유지와 운영에 대한 지원도 미비하여 성곽의 유지, 보수는 점차 관례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에 의한 청주시가지 계획 등으로 청주읍성이 철저히 파괴되면서 상당산성 등 관방시설에 대한 퇴락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가정의 달 5월에는 신록과 조화를 이루는 잘 생긴 상당산성에 올라 조상의 숨결과 흔적을 느껴보자. 이런 멋진 산성이 우리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면서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