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병문안 가는 길
오월, 병문안 가는 길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5.1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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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박영근의 시 꽃들 中>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노래한 박영근 시인의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다 사무친 구절이 서산가는 길에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잘 닦인 고속도로와 새로 뚫린 4차선 신작로를 지나 친구 병문안 가는 길. 몹쓸 병의 진단을 받은 친구 걱정에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은혜와 감사, 그리고 자비의 날들을 무사히 보내고 나니 어김없이 5월의 상처가 굳은살을 헤집고 되살아나는데, 오래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던 친구의 문병을 가는 길, 중년의 안위가 서럽다.

그 해 오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젊은 날의 열정이 치를 떨었던 그 시절. 감히 혁명은 꿈도 꾸지 못하면서도 서글픈 도피는 아직도 아련하다.

군화의 추적에 대한 공연한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가까운 친구를 피해 모르던 친구의 시골집으로 그림같이 숨어들었던 인연.

그 인연이 우정으로 깊어진 그 친구가 이토록 푸르른 5월에 아프다.

어느새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나이. 어느새 자식들도 다 키우고, 서로 아내들은 늙어가는 가장이 서러워 잔소리가 늘어나는데, 병문안 길을 동행하는 서로는 외로움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있다.

친구는 그저 묵묵히 기다려 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새로 귀의한 종교 이야기를 나누면서 애써 닮은꼴을 찾아내려는 안간힘. 오래된 친구는 이제 드라마를 보다가도 혼자 눈물을 흘리며 줄어드는 남성성을 안타까워하는데, 그런 감정의 비슷함에 놀라기도, 또 다행스러워 하면서 서로 위로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가 매정하고 각박한 세상에 쫓겨 정신없이 살아가던 사이, 젊은 날 애석하게 세상을 등진 친구도 있고, 그 무덤에 오월의 풀잎들은 시퍼런 제 몸을 무심하게 나부대고 있겠다.

훌쩍 커버려 어느새 성인이 된 친구 아들이 불쑥 찾아와 세상을 떠난 제 아비를 추억하며 펑펑 눈물을 흘리던 날. 그날도 오월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아들을 남겨두고 일찍 떠난 아비에 대한 원망과 제 아비의 친구를 통해 애틋한 그리움을 찾으려는 통곡은 애잔하나 대견스럽다.

푸른 오월의 이러한 서러움과 외로움도 다 살아있음으로 인해 확인될 수 있는 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도 목청껏 부를 수 없는 세상의 한계를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서러움이 씻기지 않은 오월. 망월동 묘비로만 남은 죽어간 이들의 넋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는 날들은 아직 우리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푸른 산과 들을 헤치고 비 뿌리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서산으로 병문안 가는 길.

아직은 순수한 영혼이 아픈 친구의 걱정에 끝내 눈물을 흘리고만 오월의 숙연한 하늘 밑. 살아 남아있음의 무게가 간단하지 않은 만큼 눈시울 붉히는 중년의 사랑이 위태롭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너머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박영근, 꽃들. 전문. 시집 저꽃이 수상하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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