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3)
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3)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5.1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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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서학이 금지된 조선에서 서양선교사들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지난 1831년 설정된 조선 교구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여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1836년에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 중 배론성지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최양업 신부이다.

땀의 순교자 라고도 불리는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 출생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과 이성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천주교에 입교했고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여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어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이 된다.

최양업은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사제가 되고자 떠났다가 13년 만인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된다.

그리고 입국길에 오른 지 7년6개월 만에 귀국에 성공하였지만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 하루에 80리에서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나는 등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식중독과 과로에 의한 장티푸스 발병으로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선종하게 된다.

<길의 사나이> <땀의 순교자>라고 불린 그의 장례식은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는데, 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력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도 보충하기 어려운 큰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론에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던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배 모양의 “바다의 별 대성당과 소성당” 이 있다.

그 의미는 이곳 지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항해하는 희망의 뜻을 담았고, 최양업 신부의 입국을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며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건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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