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스승
참 스승
  • 김희숙<수필가·원봉초 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6.05.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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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귀여운 미소를 날릴 줄 아는 그가 느닷없이 저녁을 사고 싶다고 했다. 모임의 회원들이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우리는 버섯찌개를 파는 집에서 만났다. 회원들이 밥을 얻어먹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재촉하자 그때야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손자를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봄이다. 당시 나는 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를 배웠다.

시는 봄날 자글자글 피어나는 꽃만큼이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날은 시의 현기증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볼펜을 잊고 갔다. 필기를 해야 하는 데 아는 이 하나 없는 강의실에 막막함이 몰려왔다. 하는 수 없이 옆자리에 앉은 초면인 그에게 볼펜을 빌렸다. 그런데 그가 빌려준 볼펜에 자꾸 눈이 갔다. 내가 잃어버리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가장 아끼던 볼펜과 색깔과 모양까지도 같았다.

너무 반가워 내가 잃어버린 볼펜하고 같다고 이야기를 얼핏 했었다. 시에 첫 걸음을 떼는 그는 내게 시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도 시에 관한 정답을 내 놓을 수 없는 딱한 처지라 마음공부 하는 것이 시인 것 같다고 얼버무렸었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에게 문학은 이해할 수 없는 장르인 것 같았다. 하나의 뜻에 스펙트럼처럼 표현되는 다양한 언어들의 세밀하고 야릇한 차이를 처음에는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몇십 년간 믿어온 언어의 장벽이 깨어지는데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혹했을까.

그러나 그는 적응력이 빨랐다. 바로 언어의 모양을 바꾸어 자신만의 시를 엮어 나갔다. 빼곡한 사회적인 명함을 갖고 있고 신망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국립대 총장 출신인 그가 퇴직 후 인생의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본인의 권위와 그동안의 사고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린 그의 용기가 참 대단해 보였다.

그런 그가 “선물입니다.”라며 볼펜을 내밀었다. 그해 봄 그의 볼펜을 보고 내가 아쉬워했던 것이 못내 걸렸던 모양이다. 그 볼펜은 하나뿐인 오빠가 좋은 글 많이 쓰라고 스위스 여행에서 사 갖고 돌아온 볼펜이었다. 난 항상 그 볼펜을 파우치에 넣어 다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에 파우치가 든 가방을 놓고 조문을 갔었다. 잠시 상가에 들러 인사만 할 요량으로 그냥 무심코 가방을 두고 간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조문을 하고 나온 나는 아뿔싸를 연발했다. 차창이 모두 박살 나 있었다. 누군가 차창을 돌로 부수고 가방을 통째로 가지고 간 것이다. 가방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볼펜이 내내 눈에 밟혔었다.

그는 요즘엔 사진과 그림을 배운다고 한다. 새로움을 향해 도전하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지식만을 가르치는 게 스승은 아닐 게다.

항상 노력하는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타인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참 스승이 아닐까. 스승의 날을 맞아 삶의 길라잡이 같은 그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이번 스승의 날에는 그에게 감사의 꽃 한 송이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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