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끈
인연의 끈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6.05.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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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반영호

출근길에 출판사 옆 부동산에서 커피 한잔했다. 문을 들어서는데 표정이 몹시 밝고 얼굴 화색이 하도 완연하여 물었더니 10여년 전 이혼한 아내가 와이셔츠와 콤비를 보내왔다며 은근 자랑이다. 몸에 잘 맞고 색상도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물론 오랫동안 함께 하였으니 어련히 싸이즈를 잘 알고 있겠고 좋아하는 색이며 스타일, 취향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일요일 부모님 산소에 갔다. 4일간의 긴 연휴 끝이고 마침 어버이날이기도 했다. 1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라서 종종 들리지만 어버이날이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생화가 좋으나 곧 시들고, 시든 꽃을 내버려두면 흉해서 오히려 놓지 않는 만 못하므로 조화를 준비했다.

양지바른 곳으로 앞이 훤히 터 있고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명당자리가 아닌가 싶어 부모님 묘소에 가면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다. 집터나 묘지터나 좋은 곳은 마음이 푸근하다. 무엇보다도 가까워 자주 찾아뵐 수 있어서 좋다. 부모님 묘는 큰형네 집과 연접된 뒷동산이다. 가는 김에 큰형님 댁도 들릴 수 있으니 더욱 좋다.

부모님 묘는 가족묘인데 아내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 봉분 없이 작은 라일락 한그루가 심겨져 있다. 라일락의 하얀 꽃은 그의 마음을 닮은 것 같고, 향기는 그 어떤 꽃향 보다도 향기롭고 오래가서 좋다. 그리고 주위에 패랭이꽃이 예쁘게 피었다. 꽃의 모양이 옛날 민초들이 쓰던 모자인 패랭이를 닮아서 패랭이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돌 틈에서 싹을 틔우는 대나무란 뜻의 석죽(石竹)이라 불릴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분록색이 도는데 평소 분홍을 좋아했으므로 선택한 패랭이다. 아내는 화장하여 흔적을 남기지 말아 달라 하였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단조롭게 꾸몄는데 후회는 없다.

라일락. 꽃말이 ‘첫사랑’ 또는 ‘젊은 날의 추억’이다. 오세영의 시 ‘라일락 그늘 아래서’가 생각난다. 석죽. 중국의 어느 마을에 용감하고 힘이 센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장사는 자신의 마을에서 밤만 되면 악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용맹하고 힘이 강한 장사는 이 악령을 죽이고자 산에 올라가서 기다리다 악령이 나타나자 있는 힘껏 악령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너무 힘이 센 장사의 화살은 근처의 바위에 깊숙이 박혀 빼낼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돌에 박힌 화살에는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예쁜 꽃이 피어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꽃을 돌에서 피어난 대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석 죽이라고 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일랜드에 사는 조카딸이 와 있었다. 홍콩에 출장 왔다가 어버이날이 겹쳐 겸사겸사 들렀단다. 참 오랜만이다. 20여 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여간 반갑지 않았다. 먼 이국 땅, 언어도 관습도 피부도 다른 낯선 곳에서 동양인으로 차별 대우는 왜 없었겠는가.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살기 좋은 복지국가라지만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힘 겨뤘겠는가. 늦도록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동안도 큰 형님은 연실 안쓰러운 표정이셨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막힌다. 연휴 끝이기도 했지만 어버이날 부모님을 찾았던 효자효녀들의 귀향길이기에 정체된 길도 예쁘게 보였다. 이혼한 아내에게서 옷을 선물 받고 흐뭇해하는 옆집 사장님이나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언제 만날는지 기약 없이 또 멀고 먼 아일랜드로 날아간 조카딸이나 묘소에 갔던 나. 그리고 어버이날 부모님을 찾았던 차들. 모두가 예쁘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만나고 헤어진다. 차량행렬처럼 교차하고 끊기고 또 이어지는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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