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두리 사구에 바람이 놀다
신두리 사구에 바람이 놀다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6.05.12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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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최명임<수필가>

푸성귀를 내다 팔고 난 비닐하우스는 빈집처럼 썰렁하다. 몇 차례 거두어 들였는지 비바람에 시달려 너덜너덜하다. 찢어진 곳은 양말 기워 신듯 땜질을 했는데 농부의 알뜰함이 엿보인다. 성한 곳도 처지고 삭아서 언제 탈이 날지 모른다. 지붕으로 빗물이 고이면 물먹은 하늘처럼 점점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그 안에서 야단법석이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장대로 물주머니를 쿡쿡 찔러댄다. 물벼락을 맞고도 깔깔대며 웃는다.

신두리 해변 하늘이 잔뜩 물먹어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장대로 쿡쿡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왈칵 쏟아져 내리면 막 보랏빛 꽃을 피운 소나무며 모래밭에 그들, 풀숲에 작은 벌레들이 물벼락을 맞으며 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신두리 사구를 찾아 연휴를 즐기는 중이다. 새벽잠이 없어 슬그머니 빠져나와 모래사장을 걷는다. 희뿌연 물안개가 수백 겹을 쌓아놓고 비밀스런 그 너머를 지키고 있다. 멀리서 보면 운치가 있지만 갯가에서 물안개를 만나니 미로에 빠진 듯하다. 이내 돌아서 나오고 싶다. 결 좋은 모래를 한 움큼 쥐어들었더니 손가락 사이로 달아나버린다. 모래는 맨발로 걸어보아야 느낌을 더 잘 알 수 있다. 보드랍고 간질거리는 이물과의 접촉은 묘한 쾌감으로 자꾸 밟아보고 장난질을 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하늘은 제풀에 터져버렸다. 물벼락을 맞고 깔깔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물안개 너머 그곳에서 뱃고동 소리 은근하다. 집 떠난 지 오랜 뱃사내의 고독한 투정인가,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비 내리는 해변의 풍경과 뱃고동 소리에 마음이 젖어드는 아침이다.

어제 도착해서 신두리 사구를 다녀온 것이 다행이다. 날씨가 좋아 꼬맹이들이 모래 언덕에서 지치도록 놀았다. 사구는 그 존재만으로 신비스럽다. 신들린 바람이 모래를 쌓아놓고 밤낮으로 놀아나는 곳, 천연기념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대 규모이며 희귀한 동식물이 자생하고 있어 보호종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바람이 놀다 간 자리에 모래 물결은 없고 발자국에 일그러진 무늬만 무성하다. 해어지고 이지러진 모래를 들여다보니 반짝이는 고운 살결로 한 알 한 알 오롯이 살아 있다.

모래는 바위의 나신, 그 잔해들이다. 아마도 이변으로 죽은 공룡의 잔해, 시나브로 바닷물에 시달린 패총의 잔해이기도 할 것이다. 분해조차 무의미한 순간에는 한 점 먼지로 날아 소멸하였으리라. 여전히 생성의 과정을 지나는 그 무엇들과 소멸의 법칙은 이 순간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사구에서 내려다보니 누적된 세월이 느껴진다. 몇 만 년 전에는 사막이었다니 사하라 사막에라도 온 것처럼 신기하다.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은 보기도 아까운데 이곳도 별수 없이 너무 쉬이 훼손시켜버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관광객을 위해 인위적으로 손을 대어버린 탓에 자생 식물도, 생물도 사라지고 있다니 나도 공범이라는 죄책감 정도는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

내려오는 길에 풋풋한 여고생들이 어우러져 깔깔거리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에는 페퍼민트 향이 섞여 있다. 코끝으로 솔솔 냄새가 묻어난다. 펼쳐보일 퍼포먼스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하얀 망토를 길게 두른 채 줄을 서더니 슈퍼맨 흉내라도 내려나 보다.

날으듯 내리막길을 달린다. 망토가 막춤을 춘다.

“푸- 하하하-.”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웃어 제친다.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엇박자를 내는 망토가 바람이었다. 바람의 퍼포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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