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소록도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5.11 1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소록도 소식을 전한다.

그곳에 사시는 분께는 미안하지만 고흥 참 깊숙한 곳이다. 한반도도 반도지만, 고흥은 반도 중의 반도다.

반도(半島)가 ‘반 섬’이라는 말이니 고흥은 반을 넘어 ‘90% 섬’이라 해야 옳다. 우리말로 하면 고흥은 반도가 아니라 ‘거의 섬’, 그러니까 섬이라 해도 진배없는 곳이다. 게다가 고흥에는 큰 섬이 네 개나 달렸다. 동쪽 밑으로 두 개, 서쪽 밑으로 두 개다. 그런데 이 섬들이 이젠 모두 연륙교로 이어져 있어 차로 씽씽 달릴 수 있다.

동쪽 가장 밑이 나로호를 발사하는 나로도다. 정식 명칭은 외나로도로, 그 섬 동쪽에서 로켓을 쏘아 올린다. 동북쪽은 유명한 여수 향일암이지만 동남쪽으로는 섬이 없으니 그 방향으로 쏠 것이다. 그런데 관찰은 오히려 나로도가 아닌 그 위쪽 섬에서 하게 되어 있다.

서쪽 가장 밑이 작은 섬 소록도이고, 다시 그 밑이 거금도다. 소록도는 방파제 역할을 하며 1킬로미터밖에 안 떨어져 있는 고흥반도의 끝인 녹동항을 에워싸고 있다. 녹동항은 소록도 덕분에 호수와 같은 바다를 누리게 된 항구이다. 소록도도 마찬가지로 거금도에 둘러싸여 큰 바람을 호되게 맞을 일이 없다. 나병환자들이 바로 그곳에 집단수용되었다.

우리 어릴 때 그들을 문둥이라고 불렀다. 거리에서 그들은 떼로 다녔다. 손에는 붕대를 감고, 얼굴도 천으로 칭칭 싸매고 다녔다. 손가락이 문드러지고 코와 입술이 녹아내리는 천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썹이 없으면 문둥병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어렸을 때 홀로 집에 있을 때 문둥이들이 들이닥친 적이 있다. 다가오기에 도망갔는데 막상 집 문을 닫으려고 할 때 헝겊으로 둘러싼 손이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난감했다.

당시 소문은 그랬다. 문둥이들이 어린아이들 간을 빼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어린아이였다. 문을 닫을 수도 열 수도 없었지만, 이미 들어온 손목을 어찌하랴.

내 기지는 이랬다. 일단 들어오게 했다. 웃으면서 맞이했다. 남녀 혼성의 그 무리는 대여섯 명은 된 듯했다. 그리고는 기다리게 해놓고, ‘가진 것이 이뿐’이라면서 내 돼지 저금통을 통째로 주었다. 이것 쓰시라고. 그들은 웃었다. 귀여웠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례하지 않았고 빨간 저금통을 들고 떠나갔다. 글쎄 여성이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떠났고, 어머니는 돌아와서 많이 놀라셨다. 열심히 문고리를 닦으셨던 것이 기억난다.

나와 나병환자와의 기억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는 예수가 뒷모습으로 나오는 영화 ‘벤허’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나병에 걸려 멀리서 딸을 부르던 장면에서 다시 그 기억은 상기되었다.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할 것 없이 한센병은 기적만을 바라보던 천형 중의 천형이었던 것이다.

2016년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이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보낸 오스트리아의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에게 고흥군과 소록도 성당이 특별귀화를 추진하면서 그녀가 11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녀는 1962년 27살에 소록도에 와서 43년간 그들을 위해 봉사했다. 암에 걸린 자신이 짐이 될까 봐 2005년 야반도주했다. 우리나라가 좀 더 컸으면 노벨평화상을 인도 콜카타(캘커타)의 테레사가 아니라 그녀가 받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거지하러 들렸던 콜카타 죽음의 집에서 내가 본 환자들은 ‘무지의 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를 때 가장 무섭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