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의 세월호’ 그리고 ‘우리’
‘안방의 세월호’ 그리고 ‘우리’
  • 정규호 <문화기획자>
  • 승인 2016.05.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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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여전히 통곡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진도 팽목항 앞바다는 당연히 국가 영역이다. 안방이거나 병실이거나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는 사적인 공간은 더더욱 그렇다.

옥시로 대표되는 가습기 살균제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가해를 둘러싸고 급기야 ‘안방의 세월호’라는 언론의 비유가 등장했다.

피해자가 처음으로 확인된 이후 무려 5년이라는 세월동안 이 나라, 이 사회가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비극은 ‘안방의 세월호’라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비로소 충격의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295명의 죽음이 확인되었고 9명은 여전히 실종된 상태로 머물고 있는 세월호의 참극은 두말할 필요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에 더해지는 분노에 휩싸이게 한 세월호 침몰사고는 ‘졸지엷라는 시간, 그리고 ‘진도 앞바다’라는 공간의 동일성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 일치되는 사건과 사고는 충격의 속도와 세기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세태 탓인가. 가습기 살균제가 여러 가지로 허술하고 나약한 우리나라 시장에 선보인지가 벌써 11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각성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안방은 개인적 공간이고, 진도 앞바다는 사회적 공간이다. 사회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참사는 피해자가 아니어도, 또 스스로 체감하지 않아도 ‘나의 일’일 수 있다는 공분을 만들기는 한다. 비록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거리를 두는 세력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사람들은 개인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집단의 히스테리 대신 ‘나만 아니면 되는 일’쯤으로 분리시키고 싶어 한다. 안방이거나 병실이거나, 우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분리가 있으며, 가족을 비롯한 보호자의 일차적 도움을 받는 것에 위안하며 스스로 공감을 방해한다.

창졸간에, 한꺼번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것과, 그 어느 누가 피해대상이 될지조차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하나씩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 사이에 무엇이 더 무섭고 끔찍하며 두려운 일일까.

피해자는 가해자에 비해 언제나 힘없고 잘 믿는다. 미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월호 참사가 그렇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그렇듯이 가해자는 항상 우리가 제대로 모르는 사이에 피해를 주고 속이려 든다.

그런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안전의식과 예방, 감시와 처벌이 중요한 사회의 선행지수가 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언론과 시민의 역할이 국가보다 먼저, 국가보다 올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는 지속성을 상실하고 순간순간 가볍게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다. 그것은 시간에 무게를 더해주던 의미의 중심, 의미의 중력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무게를 상실한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지만, 사실은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간은 미래를 향해 진행된다. 그러나 미래에 더는 어떤 의미론적 내용도 없는 까닭에, 시간의 진행은 어디로 인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사라짐일 뿐이다.” 김태환이 재독 철학자 한병철(그는 독일어로 책을 쓴다)의 <시간의 향기>의 역자 서문으로 쓴 글이 인상적이다.

‘나’와 ‘남’ 대신 ‘우리’가 되어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그리하여 위험을 떨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일.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의 미래는 결국 우리가 먼저 나서야 만들어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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