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싹
날개싹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해설가>
  • 승인 2016.05.1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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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해설가>

물가 풀밭에도 습지의 수초대궁에도 봄 잠자리들의 우화가 한창입니다.

잠자리의 어린 애벌레가 물속 삶을 마치고 지상으로 걸어 나와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아름다운 혁명이기도 하지요.

지난해 결혼비행을 마친 잠자리가 식물조직이나 물 위에 낳아놓은 알에서 부화한 잠자리 애벌레를 수채라 하지요. 수채는 아래턱을 이용한 빼어난 사냥 기술을 동원하여 점점 살을 찌우고 살이 찌면 그만 제 몸의 살갗을 벗어야 합니다. 살갗은 단단한 큐티클로 이루어져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수채는 9번에서 14번 정도의 탈피를 해야 종령인 애벌레가 됩니다. 드디어 물속의 삶을 접고 땅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갖춘 것이에요.

잠자리 수채의 등에는 배낭을 멘 것 같은 네 장의 날개싹이 있습니다. 저는 그 날개싹이라는 말이 좋아요. 날개싹이라고 소리를 내면 마치 제 등에서도 날개싹이 돋아날 것처럼 마음이 간질거려요. 생각해보면 잠자리만큼 무모한 곤충이 어디 있나요? 물속에서 하늘을 꿈꾸다니요. 그러나 무모해 보이는 그 꿈이 발현되어 날개싹으로 돋아나 자라는 걸 보면 잠자리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거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며칠 전 왕잠자리의 우화 장면을 보고는 그만 우화!~하고 탄성을 질렀어요. 왕잠자리의 수채는 물속에서도 한눈에 그 포스가 느껴질 만큼 존재감이 뚜렷한 수채였지요. 얼마 전부터 수초 위에 얼굴을 내밀고 호흡적응훈련을 하면서 큰 몸을 잘 지탱해줄 튼튼한 지지대를 찾고 있었어요. 저는 날마다 습지에 올라 왕잠자리의 수채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튼튼한 지지대에 올라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 드디어 Y자 모양으로 등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겹눈이 대부분인 머리가 나오고, 가슴이 나오고, 배가 나와요. 아주 천천히 순서대로 차근차근 몸을 빼냅니다. 때로는 몸을 비틀기도 하고 한참을 쉬면서 힘을 모으기도 하지요.

처음 날개는 차곡차곡 꾸깃꾸깃 접혀 있다가 실금 같은 날개 맥에 혈액이 돌면서 서서히 펼쳐집니다. 얇고 투명한 날개가 쫘악 펼쳐져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은 잠자리의 환희가 제게도 전달되는 것 같아요. 삼각과 사각, 수십 개의 도형으로 나뉜 날개의 무늬가 각자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면 그 자체가 햇빛 조각이지요.

잠자리는 그대로 몸이 단단해지기를 기다립니다. 잠자리로 거듭난 이상 이미 어른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나약해요. 사실 잠자리에게 지금 이 순간은 위험한 순간이지요. 새들과 같은 천적으로부터 무방비인 상태예요.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날개가 마르고 배가 길어지고 몸속의 배냇물을 배출해서 몸을 가볍게 한 뒤라야 잠자리는 드디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리하여 하늘을 차지한 잠자리는 제 날개로 날아 제 삶을 살아가는 거랍니다.

부연하자면, 잠자리가 떠난 자리에는 잠자리의 껍질이 여전히 풀대궁을 꽉 부여잡고 남았습니다. 껍질에도 날개싹과 더듬이, 커다란 겹눈과 날카로웠던 아래턱이 고스란히 있어요. 심지어 공기가 드나들던 기관껍질까지 하얗게 실처럼 달렸습니다. 한때는 제 몸이었을 테니 살갗을 벗는 아픔이 있었겠지요. 어렸던 수채들이 때마다 허물을 벗는 성장통을 어찌 견뎠을지, 한 점 알에서 시작된 잠자리의 생애가, 날개싹이 자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생애 전체가 끝없는 자기부정과 자기혁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려놓고, 뒤돌아보지 않는 그들의 용기 있는 비약에 존경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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