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봄날은
내게 봄날은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6.05.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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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목련 봉오리 흰 깃 수줍게 살짝 보이더니, 유난히 밝고 따스한 봄볕에 하얀 날개를 활짝 폈다.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꽃다발이다. 가지 끝마다 도움닫기 하는 새처럼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 내 마음은 청명하고 훈훈한 봄 하늘로 푸드덕푸드덕 날아오른다. 이런 날은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해야지.

“엄마, 날이 참 좋지?”

평소 같지 않은 콧소리에 엄마도 콧소리로 맞장구쳐준다. 딸기밭 솎아내기를 하신단다. 올해는 알 굵은 딸기를 먹을 수 있겠다.

햇살 가득한 날만큼 비 오는 날도 좋다. 봄의 대지를 서늘하게 씻기는 빗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땅속에서 씨앗이 토실해지고 뿌리가 물먹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다음 수업을 기다리며 잠시 창밖을 보았다. 우리 학교 뒤편은 넓은 숲이었는데, 택지 개발로 산을 허물고 땅을 고르는 중장비들이 오가고 있다. 숲이었던 곳을 기억하는 고라니가 가끔 당황스럽게 질주하는 진기한 장면을 볼 때가 있다. 아직 추운 날씨에 비가 와서 더 추운데, 오늘 고라니 가족들은 저 작은 숲 어느 곳에서 이 비를 피하고 있을까? 눈썹에 걸린 빗방울 너머로 이쪽 세상을 바라보는 까만 눈망울이 보이는 듯하다. 산 아래 하얀 집, 울 엄마 생각도 한다. 오늘은 밭일을 쉬실 수 있겠구나.

점심을 먹은 후에는 동료들과 함께 따뜻해진 봄볕으로 일광욕하며 산책하는 것이 하루의 큰 즐거움이고 소중한 시간이다. 하루하루 잎눈이 크고 싹이 돋고 자라는 계절의 순환이 놀랍다. 벚나무도 느티나무도 은행나무도 전나무도 저마다 주인공이다. 바람이 불면 연두색 잎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앙증맞게 몸을 흔든다. 모두 다른 방향인 듯, 그러면서도 모두를 들썩이게 하는 같은 리듬이다. 이런 날에도 엄마에게 전화한다.

“엄마, 나무에 잎이 벌써 다 나왔어. 참 신기하다. 그치?”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웃음이 들린다. 앞산에도 벌써 잎이 다 나왔다고 전해주며, 다리가 아파 걷는 것이 싫다고 하시면서도 산나물 뜯으러 산을 오를 때는 힘든 줄 모르겠다는 봄처럼 가볍고 따뜻한 엄마의 목소리.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돌아보고 있을 엄마의 시선이 내 시선인 양 그곳 풍경이 보이는 듯하다.

봄은 경이롭다. 그런데도 봄이 오자마자 나는 어서 추운 겨울이 오기를 고대한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거칠게 눈발이 휘날렸으면 좋겠다. 아주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엄마가 집에서 꼼짝 못 했으면 좋겠다.

엄마의 봄은 너무나 짧고, 곧 뜨거운 여름이 된다. 엄마의 땀방울이 나는 두렵다. 사과를 가꾸고 밭의 작물들을 때에 맞게 키우고 거두는 계절 동안 나는 엄마가 키워준 것들을 받기만 한다. 제때 받아가는 것만도 엄마에게 기쁨이려니 하고 매번 덥석덥석 가져온다. 밭일하는 재주가 없고 게을러서 엄마의 땀을 매년 지켜보기만 한다.

겨울이 오고 눈이 오면 부지런하게 눈을 쓸고, 또 눈이 오면 또 쓸고. 누군가의 차가 오기를 기다리시겠지. 나는 시장 순대 골목에 냄비를 가져가서 순댓국 3인분을 사갈 것이다. 말린 우거지를 더 넣고 양념을 더 해서 온 식구가 푸짐히 나눠 먹고는 밖에 찬바람이 쌩쌩해도 아랑곳없이 따뜻한 방에서 엄마에게 ‘몽실 언니’를 읽어줄 것이다. 내 아이에게만 읽어줬던 책들을 이제 엄마에게 읽어줄 것이다. 지난겨울에 몽실 언니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더니, ‘그럼 나는 숙자의 인생을 써야겠구나.’ 하셨다. 이번 겨울에는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꼭 완성해야지. 나는 엄마의 겨울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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