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 짓기
속담 짓기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04.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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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

재수중인 큰아들에게 좋아하는 속담이 있느냐고 물으니 ‘고생 끝에 낙이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곁에 있던 남편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한다. 방에서 공부하던 고3 딸아이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하고, 막내아들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외친다. 제 발등의 불이 제일 뜨겁다더니 수많은 속담 중에서 당장 자기의 처지에 맞는 속담에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3, 4학년쯤에 나는 속담 짓기에 열중했다.

말로 표현하려면 길고 복잡한 상황을 단 한마디의 말로 명쾌하게 정리를 해버리는 속담의 매력에 반해버렸다.

더군다나 속담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곱씹어 볼수록 틀린 말이 없다. 그런데 속담은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뿐더러 모두 오래된 것들이다. 나는 새로운 속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후손들에게 교훈을 줄만 한 속담을 지어서 길이길이 이름을 뽐내고 싶었다.

고심 끝에 내놓은 첫 작품은 ‘힘들게 올라가면 내려올 때 쉽다’였다. 그러나 이미‘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속담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두 번째 작품은‘소나무는 겨울에 더 푸르다’였다. 그것 역시 비슷한 속담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는 친구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끝내 어디서 들어봤는지는 증명하지 못해 나를 안타깝게 했다. ‘필통 속 지우개 1년 찾기’도 마찬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그것은‘업은 아기 3년 찾기’라는 속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뒷산은 더 높아야 보인다’는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만든 속담이다. 모든 것이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는 나를 뒷산에 비유했다. 하지만 훗날 나는 이 속담을 ‘뒷산도 뒤돌아가서 보면 앞산이다’로 바꾸어 버렸다. 불행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였다.

‘큰 풀을 뽑으면 작은 풀이 보인다’는 우리 부부가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귀농하였을 때 만든 속담이다. 우리는 책에서나 보았던 농기구를 들고 비탈진 돌밭에서 진땀을 흘렸다. 아이들은 밭둑에서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저희끼리 놀아야 했다. 그때 흙투성이가 되어 울며 보채는 막내를 들쳐 업고 다시 밭으로 들어가면서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속담은 그날 뽑고 또 뽑아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던 옥수수밭의 풀을 보며 만들었다. 큰 근심을 해결한 듯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큰일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면 작은 일들은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어 수월하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해졌다.

겨울을 지내보아야 봄 그리운 줄을 안다더니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서 갖게 된 요즘의 작은 여유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속담은 무엇일까?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지 않아도 좋으니 나만의 멋진 속담 하나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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