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민주공화국
권위주의적 민주공화국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6.04.28 1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부산의 한 대학에서 아찔한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의 몸을 테이프로 묶고 음식물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섞인 막걸리를 마구 뿌린 것이다. 논란이 일자 학생회 관계자는 한 해 동안 원활한 학사 운영을 위한 액땜의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신입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공과대학에서 액땜이라는 폭력적인 샤머니즘 의식이 자행되었다.

전북과 충북에 이어 서울의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환영식을 빙자한 가혹행위는 학교를 바꿔가며 다양한 양상으로 매년 되풀이된다. 선배들은 학번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입생들을 때리거나 강제로 술 먹였고 모 대학에서는 성추행까지 발생했다. 신입생들은 대항할 엄두를 못 냈다. 전통처럼 대물림한 선배의 권위에 대항하면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방영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보도에 따르면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39분, 세월호가 바다 속에 잠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청와대 관계자가 해경에 전화를 걸어 사고 현장 동영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구조작업에 전념해야 할 해경에게 구조 활동과 관련 없는 VIP(대통령) 보고 내용을 보내라며 닦달했다.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해경은 승객 구조가 아닌 청와대 요구 사항을 처리하느라 1시간 50분의 골든타임을 허비한 것으로 취재 결과 드러났다.

청와대 요구가 구조를 방해하고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면 인명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청와대는 현장 상황을 알 수 없으니 태연하게 전화할 수 있다지만 상황을 잘 아는 해경은 인명 구조가 먼저라고, 사람들이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다급하게 소리쳤어야 했다. 선장의 엉뚱한 지시에 따라 배 안에서 대기 중이던 승객들에게 질서 있게 탈출하도록 유도하는 게 그때 해경이 할 일이었다.

대학이나 정부처럼 계통과 계급이 명확히 구분된 조직에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권위주의적 인간형들이 자주 출몰한다. 이들은 ‘내가 몇 학번인데, 여기 청와댄데, 나 누군데’라고 말하면 약자들이 받들어 모실 거라 생각한다. 저열한 권위의식이다. 이를 거부하거나 이에 토를 다는 건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모독이라서 위험하다. 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소신과 신념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내 몸에 오물 막걸리를 뿌리면 격렬히 저항해야 하고 인명구조가 급하면 청와대가 아니라 그보다 높은 곳이라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러지 못했다. 신입생들은 타율과 강제, 규율과 복종으로 가득 찬 교실에 12년 동안 갇혀 있었고 공무원들은 권위에 대항하거나 명령을 거역해본 적이 없다. 하늘 같은 대학 선배가 시키는데 어찌 거부하랴. 내가 해경이었어도 청와대 전화를 쉽게 끊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소신 있게 권위에 대항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니까.

사회 전체가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위정자들은 여전히 경제타령이다. 이번에 치러진 20대 총선 공약 대부분도 경제 살리기였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경제공화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돈 버는 데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그 많은 후보 중 만연한 권위주의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공약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헌법 1조 1항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권위주의적인 민주공화국이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