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경의 역사가 살아 있는 청주읍성
서원경의 역사가 살아 있는 청주읍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4.2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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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에도 돌로 쌓은 멋진 성곽이 있었다. 지금의 성안 길을 중심으로 무심천을 천혜의 해자로, 그리고 우암산을 유사시에 활용할 배후 성으로 외적을 방어하는 석성이 존재했다. 청주에 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신라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고, 9년에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몇 배로 넓어진 국토를 다스리기 위해 9주 5소경으로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정칟문화적으로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국토의 거점으로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경성은 지방 행정의 중심적인 기능을 하도록 왕도인 경주 서라벌과 같은 도시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청주읍성 안에 우뚝 서 있는 용두사지철당간은 고려 초기에 이곳이 고을을 다스리는 정치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청주읍성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에 919년(태조2) 왕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과 ‘고려사절요’에도 930년 태조가 청주에 와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362년 공민왕이 청주에 머물렀을 때 무지개의 한쪽 끝이 내성을 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까지 피난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중에 7개월 가까이 청주에 머물렀다. 고려 말에 ‘이색 등이 청주 옥에 갇혔을 때 청주에 큰 비가 내려 무심천이 넘쳐서 읍성의 남문이 부서지고 성안에 한길이 넘는 물이 찼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주읍성의 둘레가 1,084보이고, 안에 우물 13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실록과 지리지, 그리고 고문서 등에 청주읍성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난다.

청주읍성은 둘레가 약 1.8㎞이며, 동문(벽인문), 서문(청추문), 남문(청남문), 북문(현무문)의 4대문이 있었고, 남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은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 즉 지금의 성안길을 중심으로 동서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는데, 서쪽지역에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 그리고 사창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하였고 동쪽지역에는 주택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러나 청주읍성의 최후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보복성 파괴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1910년 국권강탈 이후 관찰부 대신 청주에 도청이 설치된 후 1915년까지 진행된 시구 개정사업을 명분으로 성벽을 헐어 그 돌로 하수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석교에서 일직선으로 남문에서 북문으로 통하는 신작로를 만들게 되는데, 그 길이 바로 ‘본정통(本町通→중앙로→성안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했던 청주성을 박춘무, 조헌 등의 의병에 의해 성을 빼앗기고 도망쳤던 일본이 그 보복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청주읍성을 파괴하고 헐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일부이긴 하지만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잃어버린 청주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성벽 복원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청주읍성 내에 있었던 관아와 사창과 충청병영의 여러 부속 건물들의 위치를 찾고 고증하는 일이 시급하다. 현재 성문의 표석을 세운 것처럼 이러한 시설들의 표석이라도 세워야 한다. 또한 성안길의 맨 남쪽, 육거리시장 입구 주차장 공터에 읍성의 남문(청남문)이라도 복원해 청주의 자존심을 세워주길 바란다. 청주와 비슷한 규모의 전주에 풍남문이 문화도시의 자존심을 지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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