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2)
새로운 빛을 향하여 - 제천 배론성지(2)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4.2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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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달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하며 신학생들에게 한자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1856년 신학교에 푸르티에 신부가 부임하게 되고, 1862년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교 교수로 오게 되면서 신학생은 총10여명으로, 라틴어와 철학 및 신학을 배우며 그밖에 서양문물과 동물, 식물, 지리학, 과학, 의학 및 일반상식과 한글, 한문, 천문학, 음악 역사, 자연과학 등 사회적 여건 탓에 규모는 작았지만, 최초로 서양학문을 시작하였다는 사회개발적인 의미가 있고, 신분과 계급에 구애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평등적이고 과학적인 학풍을 심어주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 밖에도 푸르티에 신부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조선의 식물학과 지리학, 동물학에 관하여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짧은 글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문헌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고 1874년 Decaisne이 푸르티에 신부의 업적을 기념한 Pourthiaea란 장미과의 한 속(屬:생물 분류상의 단위로 과(科)의 아래, 종(種)의 위)을 설정한 것이 그의 식물학 발전에 대한 커다란 공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한국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둬 이 신학교에서 조선어연구와 문법서인 라한한사전(羅漢韓辭典)을 10년간 연구 끝에 탈고했을 정도로 인문학 지식도 갖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교수, 신부, 장주기 성인 등이 체포 및 순교하였고, 3월2일 신학교가 폐교되면서 안타깝지만 한 명의 사제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원산학사의 설립이 1883년인 것에 비하면 무려 30여년 앞선 유학(儒學) 이외의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신학교 상황을 정리하여 보면 배론이 큰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배론 골짜기를 지나는 길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집 앞을 지나가는 외부인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큰소리로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신학교에 있는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책과 살림살이를 땅속에 묻고 신호가 있기만 하면 도망할 준비를 하는 등 늘 불안한 박해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다.

특히 방 2개 중 1개는 신학생들의 공부방으로, 다른 하나는 신부의 거처방으로 쓰여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으며, 이 오막살이는 성당구실도 하여 최양업 신부의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신학교는 6·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1930년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배론 교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1948년 9월 27일 주재용 신부가 작성한 도면 등을 참고로 2003년 현 위치에 복원된 성 요셉 배론 신학교는 충북 지방문화제 제118호로 지정되어 그때의 모습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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