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팔다
쌀을 팔다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4.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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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섬이었다. 촌부가 경상도 말로 ‘쌀 팔아먹고’라는 말을 했다. 한국인의 맛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었다. 갑작스럽게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내 어렸을 때 어른들은 ‘쌀을 사오라’고 하지 않고 ‘쌀 팔아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싸전에서 쌀을 판다’는 것은 주인이 쌀을 파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손님이 쌀을 사는 것도 뜻할 수 있었다. 어린 나는 많이 헷갈렸다. 그리고 이상했다. 왜 쌀을 사는 것을 파는 것이라고 하는지?

섬마을 아낙이 ‘쌀 팔다’고 했을 때 그 맥락은 분명 쌀을 구해 먹는 것을 가리켰다. 예전 같으면 섬에 양곡이 없으니 해물을 내다 팔아 쌀을 샀을 텐데, 요즘은 해물을 맛나게 해먹고 있다는 표현에서 그 말이 툭하고 나왔다. 젊은 사람은 정반대로 받아들일 터였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국어사전(민중서관)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다행히 내 기억이 맞았다.

* 타(동사), ㄹ변

1. 값을 받고 물건이나 노력을 주다. ↔ 사다.

2. 이름을 빙자하다. 예) 친구의 이름을 ~.

3. 정신이나 눈을 딴 곳으로 돌리다.

4. 돈을 주고 남의 곡식을 사다. ↔ 사다.

5. 여자가 돈을 받고 몸을 허락하다. 몸을 ~.



내 국어사전은 영어사전보다 오래된 사전이었다. 국어사전도 없이 영어사전부터 사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영어사전 사러 갔다가 국어사전만 사온 추억의 사전이었다. 그래서 컴퓨터에 내장된 한글과 컴퓨터 사전을 다시 뒤졌다. 그곳도 네 번째 용법으로 ‘돈을 주고 곡식을 사다’라는 항목이 있었다. 위의 다섯째 다음에 여섯 번째가 추가되어 있을 뿐이었다.

⑥ 옳지 않은 이득을 얻으려고 양심·지조 따위를 저버리다.

---나라를 ∼.

---양심을 ∼.

그런데 두 사전 모두 잘못된 표기를 하고 있었다. ‘돈을 주고 곡식을 사다’는 ‘사다’와 반대가 아닌 같은 뜻이라서 ‘↔ 사다’가 아니라 ‘≒ 사다’가 되어야 했다(1번은 ‘↔’으로 사다와 반대어이지만, 4번은 ‘〓’로 사다와 동의어다). 누가 누구 것을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왜 그렇게 쓰느냐는 것이었다. 국문과 선생님께 여쭤보니 ‘물물교환시대의 유습이 아닐까’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를테면 ‘약초나 감자를 내다 팔아야 쌀을 사기 때문에, 쌀은 사오는 것이 아니라 팔아 오는 것 아닐까’하는 추측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파는 것은 파는 거고, 사는 것은 사는 건데 왜 굳이 곡식에만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의문이 남는다.

혹 양곡이 부족한 시절 그것을 ‘산다’고 하는 것에는 일종의 거리낌이 있어 반대로 말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기보고 ‘예쁘다’고 하면 귀신이 샘내 뺏어간다고 ‘밉다’고 말해야 한 것처럼 말이다.

젊은이들은 모를 표현이다. 나이 든 사람이 내 아기를 ‘아이 미워’라고 말하는 것에 성내지 말지어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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