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기억, 주토피아 유토피아
4월의 기억, 주토피아 유토피아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4.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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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대학 새내기가 된 작은 딸이 4월 18일 수유리까지 뛰어갔다 왔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날 저녁 나는 ‘혁명의 진실은 잃어가고/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세월을 꿈꾸지 않는다’라고 단 몇 줄을 떠올리고는 말문이 막혀 버린 채 잠들고 말았다.

누구에게는 길기만 하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속절없이 짧은 시간을 한탄하게 되는 4월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

선거는 끝났고, 세월호의 아픔도 그날 4월 16일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무뎌진 가슴 속으로 지났으며, 4.19 역시 서투른 봄바람에 휘날려 흐르고 있다. 4월은 그렇게 희미해지는 기억을 간신히 놓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는 일상과 겹쳐있다.

선거에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의 구분이 이토록 모질고 궁핍한 세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이긴 것은 선하거나 옳은 것이고 진 것은 그렇지 않다는 착각. 거기에 (국민의)선택을 받음으로써 갖게 된 힘은 선택한 사람의 몫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선택받은 자에게 고스란히 헌납될 것인지가 모호한 가운데 4월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맹신되던 여론조사의 산술을 기막힌 수학적 방정식으로 풀어냈다는 유권자 대중의 지혜와 힘은 언제까지 합당한가. 그 안에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사라지고 상부상조만이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지. 참으로 복잡한 것이 인간 세상일 터인데,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의 상상력이 차라리 끔찍하다.

상식과 금기를 깨고 줄거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육식동물의 최상위에 위치한 사자가, 다양한 동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주토피아>의 시장이라는 설정은 그럴 듯하다. 그 세계가 초식과 육식, 먹고 먹히는 본능을 뛰어넘을 만큼 진화했다는 상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한 힘의 상징인 토끼가 경찰관이 된다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는 설명도 타당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동물의 세계 <주토피아>에서 시장 당선을 위해 숫자가 많은 양(羊)의 표가 필요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인간 세상에 대한 절묘한 풍자쯤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음모와 납치, 당연히 불특정 다수의 힘없고 선량한 초식동물의 희생이 불가피한 약육강식의 본능을 충동하는 짓을 그들 초식동물이 저지른다는 설정에 이르면 충격의 강도는 훨씬 심해진다.

평화의 공존이라는 대의명제에 숨겨둔 다수의 공포를 자극해 기득권과 지배력을 지키고 차지하려는 <주토피아>적 야욕의 상상은 인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약자에 의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됨은 <주토피아>를 단순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가볍게 넘길 수 없게 하는, 그리하여 그런 상상을 펼쳐 낸 인간사회를 반추하게 되는 무거움이다.

이쯤에서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가 ‘짧은’ 삶일 뿐이다.”<한병철. 시간의 향기 中>라는 말로 흐르는 4월을 달랜다. 4·19, 4·16, 4·13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4월의 기억이다. 그날들은 성경말씀 ‘너희는 나를 기억해 이를 행하여라’(루카복음 22:19)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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