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맞이하는 4·19에
김주열 열사를 추모하다
또다시 맞이하는 4·19에
김주열 열사를 추모하다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4.18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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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명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4·19혁명이 갖는 의미는 크다. 그 어떤 역사적 사건에 비추어 보아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임이 틀림없다.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고자 정작 자신들의 꽃망울은 채 꽃 피우지도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여린 목숨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한 줌의 재로 흩어져버리는 것이 아닌 오늘날 민주주의란 든든한 나무로 뿌리를 내리고 지탱하는 기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19혁명은 김주열이라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비참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 마산상업고 1학년 학생으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 규탄대회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7살의 김주열은 어린 나이임에도 부정과 비리의 잔재 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작은 숨결이 짓밟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산지역 많은 사람의 가슴에 민주주의 뜨거운 불을 지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역사의 물결을 일으키는 큰 울림이 되어 전국에 4·19혁명으로 번져나갔으며, 결국은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를 성취하게 했던 것이다.

김주열 열사의 고향은 마산이 아니라 전북 남원이다.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금지동국민학교와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원농업고(현, 용성고)에 진학했으나 집안이 어려워 자퇴했다. 이듬해 은행원이 되어 가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지인의 권유로 마산 상업고에 진학하여 마산 이모할머니댁에 간 것이 김주열의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전무후무한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시민이 선거무효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특히 개표장이 있던 마산시청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하였는데, 이때 투석전을 벌이던 시위대열을 향해 경찰이 쏜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시위대가 흩어진 후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숨기고자 김주열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던 것이다.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27일 만에 한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김주열의 비참한 주검을 당시 부산일보 기자가 사진기를 몰래 숨기고 들어가 사진을 찍었고, 이 참혹한 사진이 전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하고 분노케 했고, 결국은 4·19로 확산한 것이다.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김주열 열사의 고향에는 2001년 4월 19일 개관한 김주열 열사기념관이 있다. 김주열 열사 묘역 앞에 건립된 기념관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책상과 옷, 학용품 등의 유품과 학창시절 사진과 학적부, 그리고 마산상업고 명예졸업장과 열사에 대한 기사가 실린 각종 신문과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슬픔의 계절인 4월이 가기 전에 김주열 열사를 만나러 남원에 가야겠다. 민주주의 꽃이 영원히 피어나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와 후손들에게 남긴 몫이라는 책임감을 느끼기 위해서. 멀리 남원까지 가지 못한다면 우리 지역의 4·19 기념탑이라도 찾아가 참배해야겠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선배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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