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빛을 향하여-제천배론성지(1)
새로운 빛을 향하여-제천배론성지(1)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4.1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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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한국 교회사에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인 배론은 제천 10경에도 속해 있어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 이유는 황사영(알렉시오)이 신앙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마치 기도하듯 백서를 썼고, 이 땅에 사제를 양성을 위해 성 요셉 신학교가 운영되었으며, 시대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 사제로 12년간 살다 간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와 멀지 않은 묘재에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남종삼 성인의 부친인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유택지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는 임진왜란 당시에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들어와 일본군의 신자들을 돌보았고,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광해군 때 사신들이 들여온 천주교 서적을 통하거나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아담샤알 신부의 만남을 통해 ‘천주실의’라는 책으로 학문 전해졌다. 이에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받은 영세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배론에 천주교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 한 것은1791년(정조 15년)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유교 전통사회였던 조선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빚어진 진산 사건으로 시작된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 때로 김귀동 등 신자들이 배론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소재한 산골짜기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것으로, 입구가 좁아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살기 좋아 신앙생활 하기에 적당했다고 하는데 6개 마을로,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에 70여 호가 있었다. 또한, 이곳을 백서로 인한 역사의 땅, 최초의 신학교 교육의 땅,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성소의 땅이라 부른다.


황사영(알렉시오)은 1775년 출생하였으며 1790년 16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조 임금에게 20세 등용약속을 받고 손에 어무를 감고 다녔다고 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해 정약종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마리아)과의 결혼으로 천주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황사영은 앞날이 보장된 벼슬길을 버리고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서적을 번역하며 전교 사업을 하던 중 정조임금의 승하(昇遐)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배론 옹기 굴로 피신하여 8개월간 거주하며 초토화된 조선 천주교의 재건을 위해 비단에 쓴 편지백서를 작성하게 된다.


백서에는 박해의 진행과정과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30여 명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순교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교회가 재건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체포되어 27세의 나이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을 당하였고 그의 모친 이윤혜는<거제도>로 부인 정마리아<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서 오씨라는 농부에게 발견되어 대대로 살다가 그 후손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5년 황사영 동상을(북한제작) 기증하여 현재 배론 성지에 현양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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