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가는 길
나란히 가는 길
  • 박윤미<충주 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6.04.10 2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엿보기
▲ 박윤미<충주 예성여고 교사>

지난해 방송통신고 수업을 하게 되었다. 만남의 첫날, 초임 발령받았을 때처럼 떨렸다.

학생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했다. 너무 가난해서, 살림에 보태고 동생들 학비를 버느라,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으로, 배움의 때를 놓친 사연은 다양하겠지만 각자의 인생 굴곡을 지나 다시 학교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격주로 있는 일요일의 출석 수업을 즐거워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배움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들보다 지구과학의 교과서 지식은 좀 더 있겠지만,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는 턱없이 무지한 걸 알기 때문에 어떤 예를 들더라도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날씨, 지형, 별과 우주 같은 지구과학의 내용은 직접 겪어보는 소재가 많아 재미있어하셨다.

어느새 학년이 마무리되는 2월이 되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도 오늘 어떤 말씀을 드릴까 생각이 많았다. 교탁에 서서 오늘이 마지막 수업임을 서로 감사와 아쉬움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오늘은 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내 어릴 적 꿈부터 얘기해 나갔다. 나는 만화가, 소설가, 천문학자, 식물학자, 패션 디자이너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삶의 길을 돌고 돌아 지금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 교사를 하고 있다. 지구와 우주에 대해,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존재에 대해 나름 개똥철학을 학생들과 나누며, 별과 우주를 올려다보고, 나무와 자연을 더 유심히 본다.

요즘에 와서 내가 꿈꾸던 것들 대부분을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미싱을 배우러 간 친구, 산업체 고등학교에 간 친구도 많았던 시절, 나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 민감하지 않고 저하고 싶은 것만 집중하는 무심함과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도 그렇다.

“저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해 수필 교실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짧은 글 한 편 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나를 발가벗기고 바닥에 조금 고인 물을 박박 긁어대는 작업이다. 세상의 눈을 이겨내고 계속되는 창조의 산통을 업으로 삼는 ‘작갗란 너무 높아 내겐 참 당치도 않아 보인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으라고 말씀해주셨을 때, 잠자던 내 ‘작가'의 꿈이 다시 꿈틀꿈틀 요란하게 고개를 든 것이다.

이루려면 서툰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원하는가, 무엇을 써야 할까, 왜 쓰는가.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해일이 덮쳤다. 답은 찾지 못했지만 더 쓰고 더 채워야 한다. 더 읽어야 한다. ‘필사(筆寫)적 뽈레뽈레 독서’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노트에 적어가며 열심히, 천천히 꾸준히 하길 다짐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근 책을 펴면 곧 눈이 침침해진다. 두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너무 당황스럽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심각히 고민하던 차에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겼는데 바로 오디오북과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원하는 때에 ‘다시 듣기’ 하는 것이다.

모니터를 켜고 꼼꼼히 소개해 드렸다. 여러분이 메모하셨다. 수업의 공감대는 쉬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오디오북 정보가 유익하다, 나도 글쓰기를 하고 싶다, 어디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느냐, 지금 컴퓨터를 배우고 있는데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꿈을 이루는 건 어느 순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미 꿈을 이룬 것이기도 하고, 이루어 나가는 중이기도 하고, 결국은 삶과 함께 끝없는 진행형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