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
꽃신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04.0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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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봄볕 같은 그녀가 책방에 가자고 전활 해왔다. 보고 싶었던 책이 있었기에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녀의 집 앞, 그녀가 반짝거리는 목소리로 잠시만 기다리라 한다. 나는 차안에서 햇볕을 온몸으로 끌어당기며 그녈 기다렸다. 마당 가득 떨어지는 햇살을 꺾으며 걸어온 그녀가 한지로 곱게 싼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자꾸 받기만 하는 게 염치없고 민망했다. 상자를 받아들고 미안함에 망설이는 내게 그녀가 얼른 열어보라고 재촉했다. 포장지를 풀자 꽃신이 활짝 웃고 있었다. “제가 그린 거에요. 예쁘게 신으세요.” 검은 고무신에 아크릴 물감으로 꽃을 그려 넣어, 그 밋밋하고 투박한 검정 고무신이 화사한 꽃밭으로 둔갑해 있었다. 나를 생각하며 한 잎 한 잎 그렸을 그녀의 정성을 생각하니 아까워서 못 신을 듯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릴 적 엄마가 내게 속삭이던 그 소리와 겹쳐 귓전에서 메아리친다. 예쁘게 신으라는 그 말이.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면 엄마는 어떤 날은 쑥버무리를, 어떤 날은 밀가루 빵을 해 놓고 날 기다리곤 했었다. 그날도 엄마가 어떤 것을 해 놓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대문을 열였다. 엄마는 없었다. ‘아침까지 아무 말이 없었는데. 먼 길을 가신 걸까?’ 당시 엄마는 먼 곳에서 일을 하셨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와서 며칠을 머무르다 가곤 했었다.

동네를 다 돌아봐도 엄마는 없었다.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 대청마루에 올라가 큰대자로 누웠다. 눈을 똑바로 뜨고 위를 쏘아보았다. 마루 위로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먼지처럼 떨어지고 나는 눈을 끔뻑이며 소리 없이 양쪽 눈꼬리로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때 삐걱거리며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 일어났다. 엄마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마당을 걸어오고 있었다. 난 달려가 와락 엄마의 품에 안겼다. “어린이 날 선물이야. 예쁘게 신어~” 빨간 운동화였다. 난 운동화를 신고 마루와 방을 안데르센동화의 춤 추는 소녀처럼 쉼 없이 걸어다녔다. 그날의 따뜻했던 엄마의 품 달콤했던 엄마 냄새가 운동화를 볼 때마다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그 후 운동화만을 고집하던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 자취하던 집주인 딸이 안 신는 신이라며 내게 구두를 내밀었다. 그녀는 간호사였다. 정갈한 차림의 옷에 힐을 신고 다니는 그녀가 그때는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리고 난 하이힐을 즐겨 신었다. 그 날렵하고 멋스런 자태가 좋다. 지금도 하이힐을 신고 걷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시절 자취방에서 내게 구두를 내밀던 그녀를 떠올린다.

신발장을 열었다. 신발들이 내게 눈 화살을 쏘고 있다. 시간의 문을 들추어 주는 신발들이다. 최초의 신발로 추정되는 이집트인들이 신었다는 샌들. 추운 지방에서 발을 보호하기 위한 모카 신이 시베리아 고분군에서 발견된 후 세계의 문명화된 대부분 지역에서 계급을 상징하는 신발이 나타났으며 지금도 신발이 실용성뿐 아니라 심미적인 이유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내게 신발은 계급이나 실용성 그리고 심미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아슴하게 지워져 가는 기억들을 일깨워 주는 매개체가 된다. 신발장 안에 꽃신을 넣고 다시 한 번 쳐다본다.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해사한 꽃잎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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