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과 성황당
사직단과 성황당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6.04.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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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우리나라는 고을마다 사직단과 문묘와 성황당과 여단이 있었다. 서울에는 종묘와 사직단이 있어 한 왕조를 일컫는 말로 종묘사직이라 하였듯이 종묘사직은 곧 국가존망의 상징이었다. 지방에도 사직단 문묘 성황당 여단이 설치되어 있어 관아에서 직접 관리하고 제사를 올렸다. 관아 동쪽에 문묘와 성황당이 있고 서쪽에 사직단 북쪽에 여단이 자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청주는 원칙대로의 방향에 사묘가 배치되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청주 사묘(祠廟)조에 사직단은 고을 서쪽에 있고 문묘는 향교에 있고 성황당은 당이산에 있고 여단은 고을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직단은 지금의 사직동 사직공원에 있었고 문묘는 대성동 청주향교에 지금도 남아있다. 성황당은 당산에 있었고 여단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신봉동 옛 봉림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직단과 성황당 여단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말살됐지만 유교의 본거지인 향교와 문묘는 유림에 의해 유지되었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을 따로 설치했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있었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고 둘레에는 울타리와 문을 두었다. 지금 청주 사직단이 있었던 자리에는 광장이 조성되고 거대한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일제가 파괴한 사직단을 우리 스스로 망각하고 다시 훼손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위한 충혼탑도 매우 중요하지만 위치상으로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성황당은 일반적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당을 말하는데 각 고을에는 관아에서 직접 관리하는 성황당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각 고을에 성황당을 두고 극진히 위하였고 조선시대에도 민간의 서낭과 함께 국행 성황당을 호국의 신으로 받들어 지역의 평안을 기원했다. 청주의 성황당은 당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를 허물고 그 자리에 모충사를 세웠다가 후에 일본인 신사를 세우는 등 질곡의 현장이었다.

여단은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지내던 제단이다. 1401년 권근의 주청으로 대명제례에 따라 북교에 여단을 쌓아 여귀에게 제사지낸 후 전국에 여단을 만들었다.

제사를 지내는 대상 가운데 칼에 맞아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불에 타서 죽은 사람, 도둑을 만나 죽은 사람, 재물 때문에 핍박받아 죽은 사람,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사람,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위패는 왼쪽에 세웠다. 맹수에게 물려 죽은 사람, 추위에 얼어 죽은 사람, 굶주려 죽은 사람, 전쟁하다가 죽은 사람, 위급한 일을 당해 목매어 죽은 사람, 바위나 담에 깔려 죽은 사람, 죽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은 오른쪽에 위패를 세웠다. 제사는 청명일과 7월 보름, 10월 초하루 등 1년에 3번 지냈는데 돌림병이 극심하거나 특별한 괴변이 일어나거나 큰 전투가 있어 사람이 많이 죽은 곳에는 정례에 구애하지 않고 수시로 제관을 보내어 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사라진 사직단 성황당 여단은 이제라도 복원해서 전승해야 할 전통문화유산이다. 지역축제의 개막은 사직제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성황당은 문화원에 맡겨 민족문화로 계승 보존해야 한다. 여단에서는 전국의 용한 무당들을 불러 국태민안과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을 위한 굿판을 한바탕 열어보자. 멋진 축제마당이 될 것이다. 사직단과 성황당이 있던 곳은 현재 공원지역이어서 복원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예산도 얼마 들지 않는다. 지역문화의 발굴과 정체성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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