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상징 와우산과 와우산성
청주의 상징 와우산과 와우산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4.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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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지역 대부분의 학교 교가의 노랫말은 “우암산 정기어린”으로 시작한다. 우암산은 조상의 삶의 터전이며, 청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청주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우암산’의 원래 이름은 ‘와우산(臥牛山)’이다. 조선 영조 때 기록된 ‘여지도서’에서 처음으로 와우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우암산’으로 불렸는데, 지금부터라도 원래 이름인 ‘와우산’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인류가 처음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찾은 수단 중의 하나는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이었다.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또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높은 곳에 오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무리를 이루어 살면서도 점차 높은 곳에 울타리를 쌓고 무리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특히 고대 국가가 형성된 뒤에는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그곳을 방어하는 터전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와우산은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국 이후 고려시대까지도 계속 성을 쌓았던 결과이다. 산의 동쪽 꼭대기에서는 돌로 쌓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곳에서는 백제 토기와 여러 시기의 기와가 많이 찾아진다. 아마도 처음 청주 지역에 나타난 백제 사람들은 와우산을 터전으로 삶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와우산성은 2013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펴낸 ‘청주 와우산성 보고서’를 통해 자세한 면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해발 353m의 정상을 감싸고 서남쪽 방향의 계곡을 따라 길게 뻗은 길이 4,857m의 성벽으로 남아있다. 와우산성은 내성과 외곽의 나성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내성의 둘레는 3,069m이고, 고려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성으로 연결된 외곽을 포함하면 7~8km 정도 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성이다. 나성은 3·1공 원에 이르는 외성과 문수암 동쪽에서 이어져 향교의 뒤쪽을 지나 당산으로 이르는 외성 부분까지를 말한다.

와우산에는 옛 성터와 산자락에 조상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의 불상도 있을 만큼 지금도 곳곳의 옛 절터에 새로이 세운 사찰이 적지 않다. 사찰 터의 가장 대표적인 곳이 교육과학연구원에서 만든 생태공원 자리이다. 이곳은 계단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절터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절터로 알려진 곳에 조선시대 지방 교육을 담당하던 유교 교육 기관인 청주향교가 세워져 있다. 지금도 청주향교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 한쪽에 석탑의 옥개석이 뒤집힌 채 놓여 있어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을 보는 듯하다.

와우산은 오늘도 청주시민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이처럼 좋은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청주시민들에게는 큰 축복이다. 그러나 이곳에 옛 성터가 있고 청주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란 사실을 알고 찾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의미 없이 오고 간 많은 사람의 발자국 때문에 옛 성터의 맨살이 드러나 역사의 자취가 훼손되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

이번 주말에는 벚꽃이 활짝 핀 봄기운이 가득한 와우산으로 달려가 보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삼일 공원에서 3·1만세 운동의 함성을 되새기고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를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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