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잎
꽃과 잎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4.0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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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사람은 관찰하면서 큰다. 관심을 가지면 보인다. 그리고 보이는 만큼 안다.

관찰의 명수는 아마도 장자(莊子)일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철학자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에 대한 설명이 기가 막히다.

장자를 읽는 재미는 그의 눈을 빌려 세계를 보는 데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철학을 굳이 알고자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묘사한 동식물 이야기만 들어도 즐거움은 족하다.

식물을 기르고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훌륭해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식물의 생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동물의 행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신기하다. 이를테면 말썽장이 개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놀랍다. 개가 변한다. 더 이상 마구 짓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고, 물지도 않는다. 공격성도 줄고 자학도 안한다. 나도 이를 배우기만 하면, 좋은 선생이 될 것만 같다. 개도 못 다루면서 무슨 사람을 다룬다고 나서는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내방에서 키우던 죽어가던 화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매일 물을 주다 보니 가지밖에 없던 놈이 무성하게 잎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한 편으로는 다 말라죽었다고 생각해서 잘라버린 가지도 혹여나 살아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속상했다. 자를 때 약간의 물기를 느꼈는데 공연히 잘랐다 싶을 정도로, 한 줄기만 빼놓고 나머지 가지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나 버렸다.

꽃도 피기 시작했다. 한쪽 가지에서 꽃이 서너 군데에서 피어올라 기쁜 마음으로 생명의 귀환을 즐겼다. 그 꽃은 말라 떨어져도, 모양도 그대로고 색깔도 엇비슷해서 버리지도 않고 즐겼다. 기뻤다. 내가 죽인 놈, 내가 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개월 지나고 사방에서 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어보니 다섯 군데이었다가, 열 군데가 되었다가, 열다섯 군데나 되고 말았다. 누가 그랬던가. 봄철 철쭉은 ‘미친년 산발하듯 피어난다’고. 꼭 그렇게 터지고 말았다.

나도 주책이지, 얼마나 좋았으면 대학원 수업시간에 화분을 들고 가서 함께 보자고 했을까. 흠상(欽賞)은 역시 홀로보다는 여럿이 하는 것이 낫다. 조금씩 꽃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열다섯 군데의 폭발은 여전히 낭랑(朗)하다.

이 꽃은 부겐베리아라고 불린단다. 붉은색도 아닌 것이 보라색도 아닌 것이 농염(濃艶)하다. 곱디곱다. 많은 종류와 색깔이 있다지만 내 화분의 꽃은 푸른빛이 강한 분홍이다. 듣자하니 하와이에서 사시사철 꽃을 피운단다. 물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그 동네에서 잘 자라는 것은 맞다. 꽃이 마치 종이 같아 페이퍼로즈(paper rose)라고도 불린단다. 그래서 꽃이 꼭 가짜 같다. 듣자하니 그런 종이꽃은 배 역할을 해서 이 섬 저 섬에 씨앗을 뿌리기 좋단다.

이번에 배운 것이 있다. 잎사귀 같은 붉은 꽃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놀랐다. 흔들기만 해도 잎이 후두두 떨어지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그의 뜻이었다. 자발적인 정리,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 집중과 선택, 여분의 최소화, 꽃을 위한 잎의 희생, 그런 거였다. 꽃도 그렇게 버릴 줄 알았다.

교정의 벚꽃이 만개다. 만개의 기준은 꽃눈이 나풀나풀 오면 된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만개는 지선(至善)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진정 지선을 바란다면, 생명체라면 자기희생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번에 또 배웠다.

놀러오라. 꽃놀이하자. 환희심(歡喜心)으로 대접하겠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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