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아서
파랑새를 찾아서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 승인 2016.04.0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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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오늘도 파랑새를 찾아 길을 나섭니다. 파랑새를 찾을 자유와 파랑새를 가질 권리를 누리고 싶은 까닭입니다. 그래요. 파랑새는 누구에게나 아득한 그리움, 갖고 싶고 닿고 싶은 인간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입니다.

파랑새는 저마다의 꿈이고, 희망이고, 연인입니다. 돈도, 건강도, 사랑도, 행복도 모두 파랑새의 다른 이름들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파랑새를 잡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치장도 하고 삶의 내공도 쌓습니다.

수많은 복병과 걸림돌에도 굴하지 않고, 더러는 실망하고 좌절하면서도 파랑새를 잡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설사 부질없는 헛수고의 연속일지라도 결코 파랑새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인 이정하는 ‘파랑새’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파랑새를 찾아 숲에도 가보고/ 휘황찬란한 궁전에도 가 보았다/ 실망하여 집에 돌아오니/ 집의 추녀 끝에 파랑새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파랑새는 결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기적도 신기루도 아니었습니다. 귀여운 손주가 파랑새이고, 아들딸과 아내와 남편, 부모님이 바로 파랑새라는 걸 모르고 살았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좋은 친구도 선생님도, 일터도 직업도 다 파랑새였습니다. 파랑새의 둥지가 바로 가정이었고 공동체였던 거지요.

이처럼 파랑새가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사랑의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데도 애써 먼 곳에 가서 기웃거리고 헤매었던 겁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파랑새를 몰라보고 굳이 먼 곳에 가서 파랑새를 잡으려고 생고생을 하는 거지요.

파랑새는 잡으려고 달려가면 달려간 만큼 멀어지는 무지개와 같습니다. 산비탈에 걸린 일곱 빛깔 예쁜 무지개를 잡으려고 무작정 달려갔다가 실망하고 힘없이 돌아섰던 유년시절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환상과 집착으론 파랑새를 잡을 수 없습니다.

파랑새는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소박한 삶 속에 둥지를 틀고 깃듭니다. 원망과 저주와 미움 속에는 결코 파랑새가 깃들지 않습니다. 파랑새는 사랑이라는 밥과, 진실이라는 국과, 정성이라는 반찬을 먹고삽니다.

사랑과 진실과 정성 중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면 어느 날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리는 참으로 야속한 새입니다. 아무리 따뜻한 둥지일지라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둥지를 박차고 나가는 야멸찬 새입니다.

파랑새! 잡기도 어렵지만 잡았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옆에 끼고 살 수 없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그 파랑새를 애타게 찾습니다. 파랑새는 사랑할 수 있어도 소유할 수 없는 새입니다. 한 번 잡았다고, 둥지에 가두었다고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랑새는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명화처럼 조금은 떨어져서 보는 것입니다.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며, 채우는 게 아니라 베푸는 것입니다. 요즘 일자리가 없어 백수로 지내는 젊은이들이 파랑새를 찾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파랑새가 없어서가 아니라 숫제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세대들에게 파랑새는 사치인 거죠. 파랑새가 없는 삶은 내일이 없는 삶입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그런 청춘들에 미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비극입니다.

파랑새는 청춘들의 특권입니다. 청춘들이 특권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국가와 기성세대의 책무이며, 그런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입니다. 오늘도 저만치서 지저귀고 있는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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