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보듬는 신문
아픔을 보듬는 신문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4.0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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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신문의 날에 부쳐

수요단상
▲ 정규호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날이 신문의 날로 정해진 까닭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올해 신문의 날은 60회를 맞는다. 1갑자의 세월이 흐른 셈인데 요즘 인기 있는 노래 <백세인생>의 가사,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가 떠오르면서 신문과 청춘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신문과 청춘은 닮았다.

신문종사자들에게는 힘 빠지는 소리겠지만, 팔팔하고 푸르른 이미지의 청춘보다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탄식과 더 닮았으니, 동병상련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신문은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이 땅의 청춘만큼이나 휘청거린다.

사람들은 갈수록 신문을 덜 보고(아니 보기는 본다. 다만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가끔 훔쳐볼 뿐이다), 종편이며 인터넷 매체에 이르기까지 정보는 봇물처럼 쏟아지며 차분하고 신중한 신문의 열독을 방해한다. 이것들은 신문이 처한 아픔의 외부적 원인이다.

식어가는 신문종사자들의 열정, 열악한 제작환경, 근성의 부족 등 스스로의 푸념에서 비롯되는 흔들림은 내부적인 치유의 필요성에 관한 일이겠다.

문제는 아픔을 치유하고 극복함으로써 희망을 품도록 하는 일, 즉 신문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는 데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자리를 ‘아프니까 외면한다’로 채워 넣는 듯 힘겹고 위태로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니 대개는 고민 없이 아프지 않고 편안한 길을 택하거나 차라리 도저히 아플 수 없는 길을 택하고 있다. 어쩌면 신문도 그렇다.

“신문은 성경이다.” 처음 신문 기자가 됐을 때 어느 선배가 하신 말씀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신문기사는 잘못을 바로잡고 잘 됨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성경과 같다는 설명도 생생한데 불과 몇 해 전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이후 더욱 절실하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과 같은 생각이 드는 만큼 초심이 그립다.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부분>’는 구절은 신문의 날을 맞아 더 절절하다.

“저널리즘은 항상 제3의 입장, 중립의 불편부당이라는 허구의 위상을 의제하여 거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대상과 관계를 맺은 모든 입장을 불순하고 저급한 것으로 폄하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 진실의 낭비자로 철저히 소외시킵니다. 상품의 소비자, (경기장)스탠드 위의 관객, TV앞의 시청자 등… 모든 형태의 구경꾼의 특징은 대상과 인식 주체 간의 완벽한 격리에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 ‘관계의 최고 형태’에 적혀 있는 저널리즘에 대한 소회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시대보다 한 발 먼저, 독자에게 한 걸음 더’라는 올해 신문의 날 표어도 이와 같은데 시대를 앞서는 직관과 미래에 대한 희망, 더불어 독자(대중)에게로 향하는 접근성의 양면을 신문종사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시대와 사람의 아픔을 보듬는 신문이 보고 싶다. 신문이여! 푸르게 빛날 민낯의 청춘이여! 영원히 펄럭이는 깃발로 길이길이 살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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