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선물
봄날의 선물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6.04.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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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삼월 끝자락 친구가 다녀갔다. 삼십여 년 전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꼭 연락을 해와 얼굴 마주 보는 행복을 선사한다. 자주 연락하지 않는 무딘 내게 섭섭함도 있으련만 늘 변함없는 그녀가 고맙다.

원주에 있는 친구도 볼 겸 떠난 길 우리는 치악산 자락을 산책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우리나라처럼 아기자기한 산이 없단다. 내가 늘 보고 스치는 산이 그녀에겐 그리움이고 만지고 싶고 걷고 싶은 고향인 셈이다. 터질 듯 부푼 잎눈의 소곤거림으로 부산한 나무들 사이 하늘은 푸르고 깊게 내려와 있었다. 정말 봄인가 봐. 소녀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는 친구 뒤로 까마귀 한 마리 날아와 도랑 가에 앉았다. 난데없는 방문에 고요하던 버들강아지 휘청 일어서는데, 까마귀 윤기 도는 날개에도 솜털 보송보송한 버들강아지에도 햇살이 파르르 눈부셨다. 봄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켜던 친구가 갑자기 쑥스러운 듯 배를 가렸다. 어느새 뱃살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 듦에 까르륵 웃는데 까마귀가 덩달아 경쾌한 소리로 추임새를 넣는다. 어린 날 두려워했던 까마귀도 봄 길에서 만나니 눈빛이 초롱초롱 참 예쁘다.

산모퉁이를 돌자 청량한 바람 속에 향긋한 내음이 솔솔 묻어왔다. 어디서 올까 둘러보니 무채색 풍경을 배경으로 생강나무가 노란 꽃등을 환하게 켜고 서 있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을 떠올리며 생강나무 울타리 알싸한 향기 속으로 쓰러지던 점순이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설렘일 거라고 두런두런. 그윽한 향을 즐기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길에서 친구는 생강나무처럼 은은하게 그리운 사람으로 살자고 했다. 그녀는 내가 호들갑스럽지 않아 좋다고 했다. 오랜 세월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마음으로 서 있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여린 마음과 달리 자칫 무심하다 여겨질 만큼 표현이 서툴고 굼뜬 나의 단점을 사랑으로 기억하는 친구가 또 고맙다. 그녀의 마음이 꽃향기처럼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청명. 제대로 봄이 열리는 맑은 사월. 친구는 떠나고 생강나무 향기만 어렴풋이 남았다. 그녀가 선물한 예쁜 병에 담긴 향수를 살짝 손목에 발라보니 달큰하다. 친구 덕에 한동안 향기나는 사람이 되게 생겼다. 늘 그리운 사람으로 은은한 벗으로 남아야지 생각한다. 고혹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있는 듯 없는 듯한 내면의 향을 가진 그런 사람이어야지.

아쉽게도 보지 못하고 떠난 선운사 동백과 무심천 만개한 벚꽃 사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닮은 조선의 문신 정구의 시<회연초당>에 마음을 담아 봄날의 선물로 보낸다.



小小山前小小家(소소산전소소가) 자그마한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었네

滿園梅鞠遂年加(만원매국수년가) 뜰에 심은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나고

更敎雲水粧如畵(갱교운수장여화) 구름과 시냇물이 그림처럼 둘렀으니

擧世生涯我最奢(거세생애아최사) 이 세상에 나의 삶이 사치하기 그지없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고단해도 봄날이 있어 새싹 돋듯 살아갈 희망을 품는다. 아름다운 봄날 그녀에게도 내게도 살아갈 날들이 사람다운 향기를 머금는 시간이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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