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소로 찾아가는 경로처럼
황금소로 찾아가는 경로처럼
  • 박숙희<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4.03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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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직지」상권 열네 번째 이야기는 6조 혜능 대사의 또 다른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고자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 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중종이 신룡 원년에 명령을 내려서 말을 하되 “짐이 안(安)과 수(秀) 두 스님을 청하여 궁중에서 공양하고 만기의 여가에 매양 일승법을 탐구하니 두 스님이 아울러 추대해서 말하되 ‘남방에 혜능 선사가 있어서 암암리에 홍인대사의 의발과 법을 받았으니 거기에 나아가 물으라.’고 천거하거늘 지금에 내시 설간을 보내어서 조서를 가지고 달려가서 영접하여 청하오니 원컨대 스님은 자비한 생각을 두셔서 속히 나와서 상경하소서. “6조 스님께서 표를 올려서 질병을 핑계로 사양하시고 숲 밑에서 마치기를 원하셨다.

당나라 중종 때 연호가 신룡(神龍)이다. 중종은 당나라 때 임금으로 측천무후의 아들이다. 측천무후가 처음에는 아들을 왕위에 놓아두었다가 나중에는 수렴청정하다가 집어치우고 다시 자기가 몇 년을 왕 노릇을 했다. 정말 여걸이었나 보다. 여왕으로 오랫동안 집권하다가 싫증 나서 도로 자기 아들한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자기 멋대로 왕 노릇을 했지만 인재를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잘 썼기 때문에 세상이 기우뚱거리거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큰 파동이 생길 것인데도 얼마나 머리가 영리하던지 인재를 잘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쓰니까 파동이 없었단다. 그리고 그 후 당나라의 황제들이 자기 소생인 중종에서 나온 후손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측천무후는 종묘사직에서 크게 대우를 받았단다.

장희빈은 묘가 형편없이 초라하게 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자기 아들이 정조대왕이 되었기 때문에 능도 만들고 또 용주사를 짓고 거기서 은중경을 판각하고 온갖 효심으로 받들지 않았던가.

안수(安秀)는 혜안대사(慧安大師)와 신수대사(神秀大師)란다. 이분들이 그 당시에 6조 스님 못지않게 두각을 다툰 스님이었단다. 두 분 다 5조 홍인대사의 제자로서 6조와는 사형사제가 된단다. 5조께서 6조에게 법을 전하셨기 때문에 그분들은 6조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국사까지 하신 대단한 분들이란다.

중중이 국정을 보다가 여가가 있으면 불교의 가장 최상승, 일승법이 어떤 것이냐고 혜안과 신수 두 스님에게 물으니까 자기들보다 더 나은 6조께서 세상에 계신다고 추대를 하셨단다. 그렇지만 6조 혜능 스님께서는 중종의 명령에 대해서 병 때문에 상경할 수가 없고, 산중에서 지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상소를 올렸단다.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이다. 이 프라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현대인의 삶의 형상을 우화적으로 써서 현대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소설가 카프카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경계인’이라 불리는 프란츠 카프카는 고작 41년 동안 세상에 머물러 내놓은 작품도 몇 권 되지 않는 변방의 소설가였지만, 사후 그의 글은 세상을 흔들었다고 한다. 프라하의 많은 명소 중 황금소로는 무척 유명한 골목길이란다. 연금술사들이 살게 되어 황금소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22라고 쓰여 있는 집에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그 22호 집이 바로 소설가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란다.

이 황금소로를 찾아가는 경로는 혜능 스님이 질병을 핑계로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숲 밑에서 마치기를 원하였던 것처럼 조금 특이하단다. 좁은 길과 비현실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집들. 골목을 내리누르는 두껍고 높은 성벽, 그리고 막다른 길과 그 문 너머의 상반된 공간은 마치 카프카의 소설 같단다. 이 경로가 우리네 삶과 닮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봄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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