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이야기
그 남자 이야기
  • 김희숙<수필가·원봉초 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6.03.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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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퇴근 후 그 남자를 만나러 갔다. 혼자 가는 먼 길이라 머뭇거려지기도 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용기를 냈다.

고속도로를 붉게 덮은 저물녘 하늘을 보며 어떤 남자일까 그려보았다. 생각이 많은 남자일 게고 좀 어려운 남자일 게고 그리고 낭만적인 사람일 게다. 한 시간 걸려 그 남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청주에서 안성이라 도간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거리가 멀었던 게지 물리적인 거리는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첫 만남이라 긴장과 설렘으로 대문 앞에서 또 한 번 멈칫거리게 되었다. 열린 문 뜸으로 언뜻 보이는 마당 잔디 위에 어둠이 고요히 내려오고 있었다.

불쑥 들어가기가 멋쩍어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이 열려 있다고 들어오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했다. 넉넉하게 웃어주는 그 남자, 상상 이상으로 멋져보였다. 옆에는 사모님이 오목조목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2층 서재로 올라가 첫 수업을 시작했다. 여덟 명이 모였다. 멀리서 온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대전에서도 그 남자를 보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지만 같은 호흡을 하는 것처럼 편안한 것은 시라는 공통점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남자는 말한다. 평생 시만 쓰며 살았다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화자 우월주의를 버리라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섬기며 쓰라고. 그러면 그것들이 말을 걸어올 거라고.

아버지가 동네 유지였다는 남자. 돌아가시며 자식에게 땅 한 뙈기 남기지 않고 동네방네 땅을 다 퍼 주었다는 남자. 그런 아버지를 둔 탓에 무소유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남자. 시를 가르치며 아무 대가도 받지 않겠다는 남자.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이고 있는 남자. 아무것도 없다는 남자. 모든 것이 다 있는 남자. 황혼녘 노을처럼 따뜻한 빛깔을 품은 남자. 그 남자.

수업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나를 그 남자가 배웅해 주었다. 자신의 인생의 은인이라는 오목조목한 사모님과 문 앞까지 나와 조심히 가라며 내 차의 궁둥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백미러에 비치는 노부부의 모습이 어둠 속에 점점 작아지고 그들의 평온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점점 확장되며 커졌다.

나도 인생의 황혼녘에서 그 남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 많이 갖지 않고도 가진 사람보다 더 넉넉한 마음의 방을 소유할 수 있을까? 부자는 마음이 부자여야 진실로 부자일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하며 내 마음의 방에는 얼마만큼의 부가 축적되어 있는지 조용히 헤아려 본다. 휑한 방안에 오만한 먼지만 가득하다. 아무것도 없지만 다 가진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남자 생각에 뒤척인다. 살아온 날들과 살아야 할 날들을 그려 본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법정스님의 ‘맑은 가난’이라는 말이 까만 머릿속에서 자꾸만 별처럼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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