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잔인함의 한계 유용성
4월, 잔인함의 한계 유용성
  • 정규호 <문화기획자>
  • 승인 2016.03.29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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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마침내 봄볕이 분주합니다.

빛이 바람 따라 일렁이는 착각 속에서, 그 따스한 기운의 세례를 받는 듯 개나리며 목련이 저마다 우주를 열고 있습니다.

공중에 매달려 노랗고 하얗게 벌어지는 꽃잎이 찬란한 4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월에 잘 어울리는 노래를 저절로 흥얼거리는 사이,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맨 먼저 치밀어 오르는 새 달의 상징이 여전히 T.S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이 문득 처량합니다.

피로 얼룩진 희생으로 민주주의를 절규했던 4·19의 희미한 기억, 그리고 아직은 상처가 생생한 4.16 세월호의 비극이 4월을 잔인한 달로 채워지게 하는 까닭이겠지요.

“우리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을 때, 거기엔 정상국가라면 응당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본 소명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자연 상태를 벗어나 국민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계약으로 근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할 때,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홍세화의 글은 읽는 자체가 충격입니다.

불신과 불안이 씻기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상처를 여태 우리가 제대로 보듬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겹치면서 더 잔인한 4월로 흐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땅에서 4월을 잔인한 달로 기억하는 일이 언제까지 거듭하여야 할까요.

전제군주의 체계에서 겨우 대한제국을 꿈꾸다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초라한 나라의 백성이 미군정을 거치면서 낯선 민주주의의 어설픔에 어리둥절하던 일.

그리고 갖가지 모순과 독재에 허덕이다가 겨우 피로 물들인 민주주의를 목청껏 외치던 4.19를 이제는 고귀한 희생의 아름다움으로 노래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 망설임 없이 깊은 바닷속에 갇혀 있는 서러운 영혼들을 불러 모아 한없이 위로하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보듬어 주는 정성이 절실합니다.

그리하여 4월 16일은 우리가 마침내 서로 용서하면서 마음을 모아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나라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백성임을 자랑하는 날로 아로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4월이 잔인한 달로 기억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4월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 법. 해마다 오는 4월은 해마다 다른 빛깔로 사람들을 더 찬란하게 해주는 기쁨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물이 빗질처럼 풀리고/ 바람이 그를 시늉하며 가지런해지고/ 봄이 그 물결을 따라/ 흔들리며 환한 꽃들을 피우네// 새 가지에 새 눈에/ 눈부시게 피었네// 꽃은 피었다 지고/ 지고 또 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눈 같은 가지에/ 다시 피는 꽃은 없다/ 언제나 새 가지 새 눈에 꼭/ 한번만 핀다네// 지난 겨울을 피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어 온 모든 계절을/ 생애를 다해 피워 올린다네// 언제나 지금 당장 모든 것을/ 꽃은 단 한번만 핀다네 <백무산. 꽃은 단 한번만 핀다. 전문>먼 산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따라 다시 봄볕이 바쁘게 하늘거립니다. 아른거리는 봄 안개를 비집고 세상을 비추는 빛을 따라 우주를 여는 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더는 잔인하지 않은 4월을 서둘러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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