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의 돌이 되지 않으려면
장기판의 돌이 되지 않으려면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3.27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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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1조다. 지난해 유승민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쫓겨나며 설파해 새삼 화제가 됐던 말이다. 야당이 아니라 국회까지 장악한 집권당을 대표하는 사람의 발언이라 파장이 컸다. 그의 말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해석됐고 결국 역린(逆鱗)을 건드린 대가를 이번 공천 과정에서 톡톡히 치렀다. 그는 이번에 새누리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도 “오직 국민만을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아직도 평등·직접·자유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대의기관을 구성하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벌어진 여야의 총선 공천과정을 보면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그가 제기한 의문에 공감하는 것 같다. 민의가 철저히 배제되는 과정에 실망하며 절차와 형식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다는 각성이 고개를 든 것이다. 특히 대표가 후보등록 마감일에 도장을 갖고 잠적하는 막장 사태로 귀결된 여당의 행태는 보수층까지도 혀를 차게 했다. 유권자들은 새누리당이 유승민을 내치기 위해 꼼수를 부리기 시작할 때부터 부당성을 지적하고 중단을 요구했다. 그의 공천 배제와 관련한 여론조사가 일관되게 부정적 결과를 내놓은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요 마이동풍이었다. 공당의 처신으로 보기 어려운 치졸한 술수가 강행됐고 결과는 처참했다. 반면 정치사에 남을 혁신이라며 자화자찬했던 오픈 프라이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천이 아니라 사천(私薦)이 됐다는 조소가 쏟아졌다. 친박과 비박의 헤게모니에서 독선과 술책만 난무했을 뿐 민심은 철저히 부정됐다. 민(民)은 주인도 객도 아닌 뒷방의 찬모만도 못한 존재였다.

민심과 유리된 행태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야당도 크게 다를 게 없다. 특히 비례대표 공천 논란은 결정적 오점이었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남성후보 중 최상위 순번인 2번을 차지한 이른바 ‘셀프공천’은 무욕의 리더십을 기대했던 지지층에 찬물을 끼얹었다. 비례대표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누차 강조했던 그였다. 굳이 비례대표를 하겠다면 후순위에 배수진을 치고 선거를 독려하는 것이 당당한 처신이었다는 비판이 거셌다.

비례대표 명단에서 눈을 씻고 봐도 소수자나 약자는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과 다문화가족, 청년층을 배려했던 19대에서 180도 역주행했다. 당선권에서 벗어난 불가능의 순위에 몇몇을 올려 시늉만 냈을 뿐이다. 그렇다고 다양한 직능단체에 문호를 열어 전문성을 반영한 것도 아니다. 여·야를 불문하고 비례대표 공천이 친위세력 구축에 악용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럴 바에야 비례대표를 없애자는 퇴행적인 주장이 공감을 얻을 정도다.

‘권력은 절망을 퍼트림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한다. 따라서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행동은 희망을 품는 것이다’. 영국의 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 정치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 아닌가 싶다. 정치가 유권자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거듭 강요함으로써 비판 의지를 약화시키는 모양새다. 집요하게 탈선을 거듭해 부모의 포기를 얻어내려는 비행소년의 심리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도였다면 성과가 없지도 않다. 막장 정치와 파행적 권력에 넌덜머리가 나 투표를 포기하겠다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위임한 권력이 사유화해 주인의 의도와 달리 남용되고 있다면 빌려준 주인의 책임도 크다. 투표를 포기하는 것은 주인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이자 권력과 정치의 타락을 방조하는 행위다. 정치 수준은 유권자의 수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경구를 곱씹을 때다. 이번 투표에서 유권자들이 실망은 했을지언정 희망까지 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어차피 지역과 진영이 물과 기름처럼 확연한만큼 누구를 공천한들 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영악한 계산에 굴복하는 순간 유권자들은 장기판의 돌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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