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 속의 새들
조롱 속의 새들
  • 최준<시인>
  • 승인 2016.03.2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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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최준

중국인들은 유난히 새를 좋아한다. 먹고사는 사정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의 집 처마 끝에는 조롱이 매달려 있다. 적게는 한두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은 마치 새 공원을 방불케 하는 집안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롱 속의 새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희소성과 빛깔과 울음소리에 따라 몸값도 천차만별이다. 날개 가진 새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조롱에 갇혀 있는 새들에게 허공은 딴 세상이다. 아무려나 새의 주인이 관상용으로 취미삼아 기르는 것이니 뭐라 말할 게재가 못 된다.

4년마다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가 다음 달로 다가왔다. 나라가 온통 선거 열기로 뜨겁다. 정치권에서 일생을 보내는 이들과 정치인의 꿈을 안고 선거에 도전하는 이들의 필사적인 각축은 대한민국에만 있는 특이한 풍경은 아니다. 출마자와 유권자로 일생 수많은 선거에 참가하게 되는 게 대의정치를 지속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운명이다. 국민은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그들에게 나라 운영을 맡긴다.

하지만 이 땅의 국민은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언동들에 기쁨보다 슬픔과 좌절을 겪는 불행을 무수히 반복해 왔다. 그들에게 거는 기대를 이미 접었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심각한 상황을 대체 누가 야기한 것인가. 선거권은 의무가 아닌 권리이니 저 싫어서 행사 안 하면 그만이다. 뽑아 주어봤자 또 그 모양일 텐데 차라리 야외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한다.

얼마 전 티브이 시사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사람의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가짜 정치인일수록 국민을 앞세운다는 그의 말은 우리 정치 실체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국민을 위해”, “국민의 뜻에 따라”. 공소하기 그지없는 이 말은 이제 정치인들의 입버릇이 아니라 조롱 속 새의 울음소리에 오히려 더 가깝게 들린다.

그뿐이 아니다. 현직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듯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인쇄한 선거 현수막을 걸어놓고 나 이런 사람이니 뽑아달라고 인정을 구걸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하는 삼권분립의 국가에서 입법부에 소속되어 있는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그들의 속내를 알 길이 없다.

아이러니다. 창조경제를 외치는 시대에 이런 원시적인 선거 방식이 왜 여태 유지되고 있는지. 생각하면 이유는 자명하다. 유권자들에게 여전히 먹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담보하는 젊은 유권자들보다 투표율이 높은 노인층을 공략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더 고집스럽게 이를 유지하려 한다. 현재를 고수하고자 그런 가치관을 공유한 후보자를 노인층은 선호한다.

그러니 변화와 발전이 있을 리 없다.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세 표보다 현재를 유지하려는 네 표가 늘 이긴다. 이게 민주주의의 원칙이자 한계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노인층이 많다는 건 이 점에서는 불행이다. 보수는 노인층의 변함없는 응원을 기대하고 진보는 젊은층의 분발을 촉구한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선거 열정만큼 정치권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의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젊은층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이뤄갈 자신감이 있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선거 안 하고 놀러간다.

아무려나, 언론은 온통 선거 얘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말도 많고 사연도 많지만 선거 결과가 어떠하든 날개가 튼튼한 젊은이들은 조롱에 갇혀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조롱 속의 새들을 조롱한다.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에게 먹이와 물을 구걸하면서 변함없는 목소리로 어제의 울음을 오늘도 여전히 넌덜머리 나도록 반복해서 들려주는 그런 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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