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교두보 양성산성
신라의 삼국통일 교두보 양성산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3.23 1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삼한일통(삼한을 통일하자)’은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한 신라는 5세기에 경상도 전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고, 급기야 소백산맥을 넘어 지금의 보은 지역에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 청주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청주지역은 차령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금강을 통해 백제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의 국가적 대 과업을 이루고자 470년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고, 곧이어 474년 문의의 양성산성을 쌓았다. 이처럼 신라가 연이어 산성을 쌓은 것은 경주를 출발하여 상주-보은-문의를 잇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시기에 옥천과 영동지역도 점차 신라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고 방향을 금강 유역으로 향한다. 회인의 매곡산성은 금강 유역에 다다른 신라가 다시 성을 쌓은 곳이며, 문의 양성산성은 보은 삼년산성-회인 매곡산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보다 넓힌 결과로 보인다.

양성산성은 옛 문의현 행정 중심지였고, 현재는 청주시 문의면 소재지인 미천리 마을 서쪽에 있는 양성산(292m)의 정상부를 에워싼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1~1.75km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성벽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우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의 여러 모습이 찾아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74년에 일모, 사시, 답달, 광석 등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925년 고려 태조 때 유금필을 파견하여 후백제의 장군 길환을 죽였으며, 932년에는 태조 왕건이 직접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산성이다. 이곳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을 쌓았던 방식으로 만들어진 둥근 연못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성 안쪽에 큰 연못을 만든 이유는 성 안에서 적을 맞아 싸울 때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서이다. 또한 홍수로 계곡에 모인 물이 한꺼번에 아래로 흐르면 성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을 한번 머무르게 한 다음 수구(水口)를 통해 빠져나가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이 둥근 연못은 지름 19m, 둘레 60m의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크다. 성벽 바깥에는 안쪽에서 모인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다. 네모꼴로 만들어진 수구를 통해 성 안쪽의 물이 배수됨으로써 양성산성은 오랜 기간 지금의 모습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양성산성을 쌓은 후 곧바로 청주 지역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으로 대표되는 백제의 강력한 군대가 청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신라는 문의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부용면 일대에 작지만 많은 성을 쌓았다. 그것은 남성골 산성까지 내려온 고구려 군대를 견제하고 보은-문의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이 넓혀진 땅을 지켰던 사람들의 흔적은 미천리 고분군에서도 찾아진다. 1500년 전 치열하게 전개되던 신라의 ‘삼한일통 정신’의 현장을 ‘남북통일 정신’의 현장으로 승화시킬 역사의 타임캡슐로 만들어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면 참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