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멈춘 기억 너머
여자의 멈춘 기억 너머
  • 배경은<사회복지사>
  • 승인 2016.03.2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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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배경은<사회복지사>

정신과 대기실, 그녀가 초조하게 앉아있다. 남편과 가끔 오던 정신과에 낯선 사회복지사와 함께 있으니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곁에 있는 책꽂이에서 얇은 패션 잡지 한 권을 그녀에게 건넸다. 숨을 고르듯이 천천히 모델들이 입은 옷을 훑고 있다. 그녀가 옷에 관심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슬쩍 어떤 옷이 마음에 드는지, 본인에게는 무슨 옷이 잘 어울릴지 물었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옷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십 대 초반에 큰 충격을 겪은 이후로 이상해 졌다는 말을 남편에게서 들었다. 알고 결혼했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는 것은 몰랐다고 한다. 정신장애로 등록하여 복지카드를 발급받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장애등록은 가족이 살아가기에 편리한 점이 많을 거라고 조언했다. 상담이 시작된 후, 3교대 근무하는 남편을 대신해 그녀와 매월 정신과에 방문하여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1년 후에 진료기록지와 진단서를 제출하면 정신장애인으로 등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끔 복용하던 약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자주 밖을 나가곤 한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 잃어버려 가족을 힘들게 하는데 있다. 어떤 날은 동네 부녀회장님이 배회하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청주 공항 근처에서 발견되어 경찰이 데려오기도 했다. 나도 집으로 방문했다가 없어진 그녀를 찾아 동네를 헤맨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천진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렇지만 화를 낼 수 없다. 외동딸과 남편, 자신의 이름만을 기억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가혹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줌마 같다는 한숨 섞인 말을 하곤 한다. 이십 대 초반의 충격은 그녀의 기억을 멈추게 했고 상담을 통해 그녀의 그 충격이 성폭행이었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 깊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죄스럽다.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면서 집을 나가는 횟수가 줄었다. 집중력도 향상되어 간단한 부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조작 기능이 생겼다. 무엇보다 한 번씩 새벽에 나가 소리를 지르거나 분노를 참지 못해 살림을 부수는 일이 없어졌다. 예전에 딱 한 번, 중학생이 된 외동딸을 발로 배를 걷어차서 정신병원에 갇힐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조용한 아내가 되었다. 특히 ‘아빠’라고 부르는 남편의 보살핌이 매우 극진하다.

드디어 복지카드가 나왔다. 남편은 이 일을 두고 내게 연방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하지만 그녀는 처음 내게 가졌던 경계를 풀고 이제 내 차를 타면 코까지 골면서 잠을 자는 것 이외엔 표정이 없다. 나를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아 이것으로 좋다. 사람들이 무서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녀의 마음을 산 것 같아 충분히 감사하다.

집을 나서면서 그녀의 남편에게 부탁했다. 고분고분 남편의 말을 잘 듣게 된 그녀에게 예쁜 봄옷 몇 벌만 사주라고, 엄마와 아내이기 전에 여자로도 살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은 활짝 웃으며 약속했다. 이번 보너스 타면 꼭 아내에게 예쁜 옷을 사 입혀 복지사님을 만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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