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가드너
게릴라 가드너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03.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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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

한동안 걸어 두었던 가방에서 구겨진 종이컵이 나왔다. 버리려다 무심코 흔들어 보니 미세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종이컵 안에는 고추씨처럼 생겼으나 그보다 훨씬 더 자잘한 씨앗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것을 허겁지겁 종이컵에 담아 왔을까?

어린 시절 엄마의 손가방에는 늘 꽃씨가 있었다. 씨는 주로 손수건이나 화장지에 싸여 있었는데 때로는 내가 먹고 버린 과자 봉지에도 들어 있었다. 엄마는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새로운 꽃씨가 있으면 구해오곤 했다. 봄이 되면 엄마는 묘상을 만드셨다. 묘상에는 엄마가 1년 동안 모아 놓은 씨앗들이 옹기종기 심겨 싹을 틔웠다. 그 즈음에 이웃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였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환한 얼굴로 꽃에 대해 설명하며 모종을 나눠주었다. 씨앗이나 모종만 보고서 어떻게 피어날 꽃의 모양과 색까지 알 수 있는지가 나는 항상 궁금했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면 엄마는 온종일 가랑비를 맞으며 남아 있는 꽃모종을 마을 길에 내다 심었다. 골목길을 따라 살피꽃밭을 만들고 우리가 매일 뛰어노는 공터의 가장자리에도 꽃을 심으셨다. 그때는 분꽃, 과꽃, 나팔꽃, 해바라기,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같은 소박한 꽃들뿐이었다. 알뿌리 꽃인 달리아와 글라디올러스가 아주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꽃의 높낮이를 고려하고 색깔이나 종류를 잘 조합해 무궁무진한 변화를 연출해 냈다. 해질 무렵이면 분꽃 향기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로 좁은 골목이 복닥거렸다.

지난해 가을 꽃씨 뿌리는 사람을 봤다. 그때는 이른 김장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모두 봄부터 심고 가꾼 것들을 거둬들이느라 바쁠 때였다. 남자는 초등학교의 낮은 담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누런 종이봉투에 담긴 씨앗을 흩뿌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스쳐 지나며 본 모습이었기에 무슨 꽃씨를 심는 것인지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꽃이 개양귀비일 거라고 섣불리 확신했다. 그러자 시골 분교의 하얀 담장 아래에 빨간 개양귀비 꽃이 피어 있는 눈부신 봄날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도시의 버려진 공터나 쓰레기가 쌓여 있는 곳을 찾아내 꽃을 심는 사람들을 게릴라 가드너라고 부른다. 요즘은 도시마다 조직을 꾸려 활발히 움직이는 추세다.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시간에 활동하는 까닭에 ‘게릴라’라는 별난 이름이 붙었다. 우선 몇몇 요원들이 대상지를 탐색하고 게릴라 가드너들에게 집결시간을 공지한다. 공격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다. 모종과 거름흙과 물을 준비해 온 전사들은 신속하게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꽃을 심고 퇴각한다.

간단한 공격에 비해 결과는 놀랍다.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늘 지저분하던 곳이 꽃밭으로 변해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제 그곳에 아무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게릴라 가드너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보고 싶어 활동하는 것일 테지만 그 꽃을 본 사람들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

이제 곧 4월이다. 몸속 어딘가에서 경작본능이 꿈틀거린다. 우선 종이컵에서 나온 씨앗을 심어 볼 참이다.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게릴라 가드너의 유전자가 활동을 시작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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