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어깨동무
  • 정현수<에세이스트>
  • 승인 2016.03.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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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 <에세이스트>

서민들과 친숙한 식판은 네모 반듯한 생김대로 정직하다. 모서리가 있지만 뾰족하지 않아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통하지 않는 절대 평등의 공간이 식판이다. 일식 삼찬의 검소를 지키며 제 몸을 남에게 무한히 포갠다. 식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일행의 식사에 보조를 맞추면서 겸손과 배려를 배운다.

밥은 왼쪽, 국은 오른쪽에 담는 규칙도 준열하다. 먹을 만큼만 담고 남기면 눈총을 견뎌야 하는 절제와 양심도 식판에서 배운다. 어깨가 닿도록 나란히 앉아야 하니 연대에도 용이하다. 식판에는 그릇 이상의 의미가 수북하다.

지난겨울, 어떤 고위 공직자가 전방의 모 군부대를 방문했다가 구설수를 샀다. 식판의 왼쪽에는 밥을 담고 오른쪽엔 국을 담아야 하는데 위치가 바뀌었던 것이다. 장병들은 그를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고 식판에 익숙지 않아 실수했을 거라며 수군거렸다. 어색한 서민 흉내가 빚은 촌극이었다.

서민 흉내가 필요한 사람들이 또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기초단체장에 욕심 있는 사람들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이들은 경주마처럼 시장으로 달려간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며칠 굶은 듯 순댓국을 퍼먹거나 어린 제비처럼 입을 쩍 벌리고 떡볶이를 먹어 보인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 않던 음식들이다. 이를 놓칠세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서민이 아니기에 서민 흉내를 내고 서민 음식에 익숙한 척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타계한 신영복 교수의 서체를 사람들은 `연대체'라 부른다. 어깨를 맞댄 듯 글자 폭이 좁고 기울게 이어 쓴다고 해서 `어깨동무체'라고도 한다. 내 어깨를 남에게 내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의 손이 내 가슴과 목에 직접 와 닿기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입장의 동일함에서 비롯되고 입장의 동일함은 연대의식을 추동한다. 경험 없는 자가 식판으로 어색한 밥을 먹거나 서민 아닌 자가 선거철에만 시장으로 달려가 떡볶이를 먹는 것은 입장이 다르고 믿음도 없는 상대에게 어깨동무를 거는 것처럼 무례한 행동이다. 서민들은 이런 어깨동무의 불편함을 쉽게 알아차린다.

위정자로서 서민들의 삶이 정말로 안타까운가. 서민들의 밥그릇과 먹거리를 따라하지 않으면 양심에 가책이 생겨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그대들의 긍휼이 깊은가. 필요할 때만 잠깐 서민인 척하다가 임기를 마치거나 선거가 끝나면 세정제 잔뜩 풀어 손을 씻고 등 돌려 안색을 바꾸는 건 연대를 가장한 연출이고 어깨동무를 빙자한 추행일 뿐이다. 진심으로 서민들과 연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함부로 식판 들지 말고 필요 없이 시장에 가지 마라.

이달 초 전직 프로레슬링 선수 김남훈 씨가 아파트 경비원들의 일자리를 지켜주어 화제가 되었다. 시간당 최저 임금이 올라 관리비가 4,000원가량 더 나오자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을 계속 고용할 건지, 아니면 해고하고 CCTV를 설치할 건지를 투표에 부쳤다. 김씨는 엘리베이터 내부에 4000원을 더 내겠다는 대자보를 써 붙여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이를 본 주민들도 `4000원 더 내기 운동'에 동참하면서 경비원들의 해고를 막았다.

서민을 자처하는 위정자들이 습관처럼 흉내 내기와 달려가기에만 몰두할 때, 진짜 서민들은 일상 같은 어깨동무로 의연히 연대하고 있었다. 많은 말이 파편처럼 겉돌고 날뛰고 찌르기만 하는 지금,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신영복 교수의 글이 어깨동무처럼 견고하게 묵직하게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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