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와 응교
동주와 응교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6.03.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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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내일도...//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5)’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갈증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론계에선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열풍이 만들어진 우상인지, 기획된 상품인지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더군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교수(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가 “윤동주라는 이름은 우리 자신과 이 사회를 조용히 혁명시키는 큰 고요”라는 말로써 지금 부는 ‘윤동주 현상’을 이 시대에 필요한 정신으로 연결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김응교 교수가 윤동주의 이름만 들어도 처음부터 반색했던 건 아니었더군요.

“윤동주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잠깐 읽을거리에 불과해.” “윤동주는 지나치게 높이 상찬받는 작가라고.” 한 때는 이런 식으로 윤동주의 시를 업신여기던 김응교 교수를 바꿔 놓은 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서시’의 한 구절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윤동주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다진 김응교 교수가 지난달에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섬세하게 복원해낸 새로운 평전으로 여겨질 만한 책인 ‘처럼’을 내었습니다.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살던 윤동주가 “괴로웠던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의 지평으로까지 살고자 했던 것을 김응교 교수의 ‘처럼’은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고 보고 싶군요.

1942년 6월 3일 ‘쉽게 쓰여진 시’의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일곱째 연이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이 적힌 원고지 아랫부분의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라는 뜻의 “시(詩)란 부지도(不知道)”와 “문학생활(文學生活), 생존(生存), 생(生)”이란 낙서가 오롯이 품어졌다가 나온 것임을 그 책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50대의 응교가 20대의 동주를 그리워하며 쓴 연서(戀書)의 한 대목은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군요.

“이 평범한 청년이 써온 시를 읽다 보면, 맹자, 키르케고르, 투르게네프 등을 만나고요. 잉어를 힘겹게 끌어당겨 올리면 팔목과 가슴에 미세한 근육이 생기듯, 윤동주의 시를 대하면 영혼에 미묘한 근육이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행복이 무엇인지,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동주와 응교, 그들이 살았고, 사는 이유는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일 겁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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