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하나
뚝배기 하나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03.1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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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꽃향기처럼 그 사람에겐 언제나 향기가 난다. 바람에 향기가 실려 오는 따스한 날이었다.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도 통화로 서로 안부를 묻고 묻는 옹기를 닮은 친구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 지 열흘, 아직도 닷새를 더 기다려야 했다. 조급함이 앞서지만 탁상달력에 빨갛게 동그라미 그려져 있는 그날, 달력만 바라만 봐도 미소가 그려지는 건 기다림이 아닌 애타는 그리움 때문이다.

만남의 여운을 안고 홀로 여행 가방을 들쳐 매고 세종시의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옹기가 있는 고을을 찾았다. 모양새도 기이한 옹기는 물론 팔도지방의 특색의 항아리들이 줄 맞춰 있는 풍경에 감탄스러울 만큼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닮은 옹기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된 감정은 꿍꽝거리며 빠르게 널뛰기 시작했다.

촌스러운 행동과 말투 탓에 굳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로 구수하고 정감 있게 다가오는 그런 친구이지만 겉으로는 강하고 꿋꿋하게 보이나 속은 부드러워 아이들도 좋아하는 친구이다.

키가 작고, 배도 볼록하게 나오고, 투박하고 못난 것이 나와도 너무나 흡사하게 닮은 항아리, 멀찌감치 보아도 고추장, 된장 등 장류를 저장하는 데 쓰일듯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어진 허릿살과 뱃살로 다이아몬드 형으로 변하는 내 모습, 항아리의 배를 닮아가고 쭈글쭈글 주름지고 심줄이 뚝 뛰어나온 손등은 항아리입구의 둔탁한 모습이다. 항아리 밑바닥이 거칠고 움푹 파인 모양은 광대뼈가 뚝 불거지고 양 볼이 푹 들어가 쪼그라진 형상과 흡사하다. 반면 그야말로 미끈하면서도 날렵하게 잘 생긴 쌀독항아리, 한복을 잘 차려입은 양갓집 규수처럼 화려한 문양으로 자태를 폼내는 친구를 닮은 쌀독들, 어찌 그리 대조적인 내 친구의 모습과 그리도 흡사한지 즐비하게 빼곡히 들어차 있는 장독풍경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사춘기 시절, 시골집 양지바른 뒤꼍에는 어머니의 보물창고인 장독대가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장맛이 좋아야 집안이 잘 된다고 어머님 늘 말씀하시며 일요일이면 장독 항아리를 닦으셨다. 덩달아 나도 열심히 낡은 수세미를 들고 닦았다.

야트막한 계단을 두 개 오르면 자갈들이 서로 키 재기 하듯 잔잔하게 깔려있고 앞줄에는 고추장, 된장 장아찌 등을 담은 작은 항아리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독대 뒤쪽 큰 항아리 속에는 어머니의 보물인 햇곡식은 물론 우리들의 주전부리인 강정과 전병들이 검정봉지에 꼭꼭 묶여 있고, 겨울철에는 곶감, 말린 감 껍질 고염 등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난 항상 뒤쪽 큰 항아리부터 열심히도 닦았다.

먼지가 뿌옇게 된 항아리 밑동을 목욕이라도 시키듯 수세미로 문지르고 물 한 바가질 끼얹으면 막 씻어 올린 과일처럼 상큼하고 매끈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청소를 다 마치고 보물 항아리에서 꺼내 먹는 주전부리의 맛은 지금의 고급과자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어머니들은 정성껏 장을 담그고 장독대를 간수하셨다. 선조들은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집을 지키는 가신(家臣)께 새벽마다 두 손 모아 정성스럽게 빌었던 장독대이다. 장을 담고 나서 숯과 고추, 솔잎을 독주위에 매달았던 풍경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다. 장맛이 그 집의 길흉을 점친다고 해서 액운이 물러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장맛이 그 집안의 맛을 좌우하기에 조상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든 풍경이다.

우리 여자들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항아리, 바람 그리고 햇살이 머무는 자리에 자연의 순수함과 맛이 담겨 있는 항아리 서민의 삶과도 너무나 흡사하게 닮은 항아리에 눈길을 뗄 수가 없는 건 숙명일까. 빗살처럼 줄지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옹기마을 항아리, 그날 난 항아리를 엎어놓고 볏짚을 태워 구멍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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