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비밀
희망의 비밀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6.03.13 2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 엿보기
▲ 박윤미

목련꽃눈이 제법 탐스럽게 토실해졌다. 3월마다 새로운 만남을 하지만 올해는 남고에서 여고로 학교를 옮기었고, 담임을 맡은 아이들은 큰 딸과 동갑이기도 하여 더욱 특별하게 생각되고 마음이 설레었다.

여고로 발령이 정해졌을 때, 내 학창 시절의 흔적들을 샅샅이 되짚어 보았다. 18세에 나는 어땠는가? 당시 썼던 일기장과 수첩, 독서 동아리 노트를 다시 읽어보고 폭발적 감수성에 스스로도 놀랐다. 내 마음은 이미 그녀들과 동갑이 되었다.

드디어 만난 여고생들, 탐색전 시기이므로 아직 새초롬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과 동갑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여야 할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벌써 겁이 더럭 났다.

상담을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생, 18세의 고민은 성적과 잠으로 귀결된다. 학교 수업과 보충수업, 야간 자율학습, 학원과 과외를 하는데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성적. 어른들은 정신력으로 이겨내라고 하지만 매일 어느새 오셔서 나를 점령해 버리시는 그 분, 잠.

아이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올 한해를 보람되게 지내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려 나름 애를 썼다. 그리고 목표 세우기, 시간 계획 세우기, 수업 집중하기, 꼿꼿한 바른 자세로 공부하기, 잠 줄이는 대신 집중력 높이도록 훈련하기, 적절한 목표와 작은 성공의 경험 누적하기 등의 처방을 내렸는데, 결국 모든 아이들은 비슷한 처방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진희(가명)에게 내려진 처방은 달랐다. 진희는 작고 여린 체구에 맨 앞자리에서 단호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첫날 임시반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는데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하지 못했다. 다음에도 꿋꿋이 손을 들었지만 매번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마음의 상처라도 받지 않았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상담을 하느라 가까이 마주하여 보니 의외로 이목구비의 선이 굵고 뚜렷하다. 말과 웃음도 묵직하다.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는데 중학교에 육상부가 없어 이어가지 못했단다.

그래도 여전히 초등학교 체육교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으로 알 수가 없다. 이제 작은 체구가 단단하게 보인다. 가까이 얘기하니 웃기도 잘하는구나.

- 영어를 잘하는구나.

그런데 묵직하던 아이가 갑자기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하여 잠시 기다렸다.

- 중학교 때 학원을 다녀서 영어를 잘했어요. 80점대 받은 적도 있지만 대체로 100점 맞고 그랬어요. 잘했는데, 그런데, 그게 너무 싫어요. 그냥 선생님이 100점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받았고, 하라는 대로 공부했었던 거, 그렇게 살았던 게 너무 싫어요. 지금 혼자 공부하면서 성적이 오르진 않았지만 내가 하고 있다는 그게 너무 좋아요.

나의 처방은 없었다. 그냥 응원하며 지켜보겠다고 했다. 진희는 이제 스스로의 힘을 믿게 되었고 삶에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가 있다. 기특하다.

일찍 성숙해지는 아이도 있고 조금 느린 아이도 있다. 한 나무에서 피는 꽃봉오리도 피고 지는 때가 다른데, 하물며 아이들은 모두 다른 나무이고 다른 꽃들이다. 조금 느리다고 해서 뒤처지는 게 아니다.

모두 어느 순간 활짝 피어 각자의 빛과 자태를 뽐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들의 꽃눈이 영그는 시간을 지켜보는 따뜻한 눈길이 되겠다고, 진희처럼 굳건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