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
시간 여행
  • 임정숙<수필가>
  • 승인 2016.03.0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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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정숙

이젠 꿈쩍도 안 한다. 기력 떨어진 낌새가 요 며칠 반복되긴 했었다. 열쇠 수리공은 사무실 번호 키 제조 날짜를 보더니 백 살은 살았다고 한다. 기계를 1년 사용하면 사람으로 치면 십 년을 산 거나 다름없단다. 수리공의 재치 있는 비유로 보면 호호백발 노인의 세월을 산 셈이다. 결국, 갓 태어난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새로운 키가 자리를 대신했다.

손바닥만 한 번호 키가 출입문 늘 있던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폐물이 된 모양을 보니 씁쓸하다. 비록 쇳조각에 지나지 않은 물건에 불과하나 습관처럼 번호 키를 누르며 맘 편히 드나들던 존재감을 비로소 실감한다. 말없이 백 년 목숨을 다해 묵묵히 수문장 역할을 다한 수고가 대견할 뿐이다.

언젠가 TV 방송에서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특별한 하루를 정해 살아보는 ‘미래일기’라는 시간 여행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었다.

화려했던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인 사십 대의 출연자가 여든 살 독거노인으로 변신을 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하루를 미리 살아보기 위해서다. 갑자기 낯설기만 한 백발에 주름진 얼굴을 찬찬히 만져보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이 힘차게 축구를 하는 광경을 보며 회한에 잠기기도 한다. 가족은 떠나고 홀로 밥을 먹으며 자꾸 의기소침해지는 노년의 삶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미래 여행을 체험하며 돈·명예보다 잊히는 게 더 무섭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40주년 결혼기념일에 77세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 한 연기자도 남편과 노부부가 되어 마주한 순간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 아내를 남편은 “당신은 곱게 늙었다. 예쁘다”라고 다독이며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은 뭉클함을 자아냈다.

특수 분장만 했을 뿐인 가상의 세계임에도, 실제인 것처럼 묘한 슬픔에 빠진 그들의 감정에 동요되어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소멸의 과정을 곱씹게 한다. 어찌 살다 보면 시간은 기다림을 모르고 눈 깜짝할 사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서성인다. 늙지 않고 아픔 없이 오래 살 수 있길 꿈꾸어 본 적이 왜 없을까.

동화 ‘트리갭의 샘물’ 이야기가 떠오른다. ‘위니’라는 소녀는 우연하게도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는 샘물을 마신 터크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지금 똑같은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아야 하는 터크 가족은 급기야 두려움을 품는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상태로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서야 하는 것을 재앙이라 여기며, 가장인 터크는 자신과 가족을 목숨 바쳐서라도 생명의 수레바퀴에 동승하고 싶어 한다.

위니는 영생의 샘물을 앞에 두고 갈등하지만 결국 한정된 삶을 선택한다. 터크 가족을 지켜본 깨달음의 결과였다. 정지된 시간으로 끝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터크 가족에겐 무의미하고 지루한 불행의 나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꿈을 꾸며 서로 헌신하고 애썼던 날들의 먼 이별은 분명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꽃이 아름다운 건 언젠가 꽃이 지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삶의 애착과 열정을 놓지 않는 건 언젠가 그것이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변하고, 성장하고, 늙고, 사라짐으로써 다음 생명에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이치가 순리인 것은 현명하다.

출입문에 무심한 듯 매달려 백 년 소임을 다한 번호 키의 흔적은 충직한 사람, 누군가의 인생을 고스란히 닮은 듯하다. 나이가 더할수록 작은 사물 하나에도 애틋한 마음이 머문다. 남은 시간 여행의 갈망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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