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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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12.0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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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戒)는 구속이 아니라 해탈수행법
諸惡莫作(제악막작) 갖가지 나쁜 짓 꿈엔들 하오리까

衆善奉行(중선봉행) 착한 일 얼마든지 받들어 행하오리니

自淨其意(자정기의) 그리하여 내 마음 청정하여지면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부처님 가르치신 법이니라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길 바란다. 계(戒)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무엇이든 구속되거나 갇히거나 묶여 있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으로 이끄는 계(戒)를 해탈수행법(解脫修行法)이라 한다.

계는 구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계는 구속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계는 근본적으로 선한 행위 즉 선하게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선(善)하게 살 때 악(惡)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된다. 계율을 잘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본래 나 자신은 공(空)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욕심을 버리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모기나 파리를 잡은 뒤 지옥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워할 수 있다. 물론 죽이지 않으면 더욱 좋지만, 너무 죄의식에 빠져서도 안된다. 한 마리를 죽였으면 열 마리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비심으로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아가도록 해야한다. 수계의식문에 앉아서 '계를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계를 받는 공덕이 무량하다'고 했다.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고, 알게 되면 공덕이 있다는 뜻이다. 모르면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하게 되지만, 알게 되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기 때문에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계율을 부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처럼 받들어야 한다.

계율은 부처님의 생명이기에 계율이 죽으면 불법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 계는 고통의 수렁에서 올라올 수 있는 밧줄과 같고, 고통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와 같다고 했다. 또한 계를 지키는 것은 옷이 몸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살이 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여있는 마음으로 살도록 힘쓰기를 바란다. 자기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잘 관찰하게 되면 불행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곧 수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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