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건망증
  • 김희숙<청주 원봉초 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6.03.03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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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시간은 어김없이 지난 계절의 기억들을 하나 둘 대지 위로 토해내고 있다. 꼭 그 자리에 꽃을 피워내고 새순을 흩뿌리고 훈기를 품을 바람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시간이 기억들을 지우고 있다. 몸의 감각들이 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력이 퇴화하고 청력이 퇴화하는 듯하더니 기억이 날아가고 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계절을 지나면서 감정이 풍부해 지고 이해력도 확장되고 조급함도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꼭 오늘 아니면 안 되는 일 없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되는 법도 없고, 꼭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 또한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달아 간다. 어쩌면 이는 내 감각들과 맞바꾼 깨달음이 아닐까.

어느 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라인은 손님이 쓰시던 제품이 단종되었으니 다른 것을 사시는 것은 어떠세요?”라고.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인가하고 가만히 들어보니 그가 점원을 통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선물을 들고 돌아온 그에게 무슨 날이냐고 묻자 결혼기념일이란다. 선물로 내가 화장품이 필요하다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내가 그에게 뭘 사주기로 했었는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 꿈속의 일이 눈곱만큼도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로 선물을 받았다. 며칠 전 그 일이 고맙다는 단어와 함께 머릿속에 번졌다.

퇴근길에 우체국에 갔다. 문 닫기 바로 직전에 간신히 도착해서 아들에게 허둥지둥 소포를 부쳤다. 한숨을 돌리며 카드로 계산하고 차를 몰아 마트에 갔다. 피곤에 지친 내게 오랜만에 몸보신을 해 줄 요량으로 삼계탕 거리와 찬거리를 샀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계산대에 서서 지갑을 열었다.

그런데 지갑 속에 카드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에 쓴 내역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우체국이 머릿속에 재빠르게 스쳤다. 그곳에 카드를 놓고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카드가 없으니 계산하려던 물건을 그대로 놔두고 돌아와야 했다. 그때의 당혹함이라니. 트럭 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트럭이 떠나버렸을 때의 황당함이 이런 것이리라.

다음날 아침 아홉 시가 되기를 기다려 우체국에 전화했다. 잘 보관하고 있으니 찾으러 오란다. 고맙다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엔 식탁 위에서 도토리를 발견했다. 잘 익은 도토리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도토리 인지 왜 거기 있는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났다. 남편 왈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관찰용으로 제시할 자료라며 산에서 주워왔단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게 가을의 일이니 도토리는 몇 달째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난 도토리를 들고 출근을 서둘렀다. 주유를 현금으로 하며 카드가 생각났다. 며칠째 카드를 못 쓰고 있다. 퇴근하며 우체국에 들러서 찾아온다는 것을 자꾸만 잊게 된다. 오늘은 기필코 카드를 찾으리라.

퇴근길, 빵 한 봉지를 사들고 우체국에 갔다. 아저씨가 웃으며 카드를 내민다. “잘 챙기세요.” 난 계면쩍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정신아~ 제발 내 곁에 머물러 다오.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이대로는 못 보내~” 혼자 중얼거리며 우체국 문을 열고 나왔다.

봄이 온 줄 알면서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찬바람이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다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마치 내 기억의 한 모퉁이를 들고 내달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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