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아침에
삼일절 아침에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3.0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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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지난 3월 1일은 꽃샘추위가 한풀 꺾이고 햇살이 따사로운 아침이었다. 잔설이 쌓인 집안 마당을 거닐며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온 몸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과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한적한 시간의 여유가 행복한 마음을 불러옴직 했건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고백컨대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만큼 3월 1일을 맞았겠지만 삼일절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낸 날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휴일을 의미하는 달력의 빨간 날로만 여겨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올해의 삼일절에 이렇게 살아온 삶이 부끄러워지고 죄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두 편의 영화가 남겨준 가슴 먹먹한 여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인 몽규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흑백 영화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말살정책, 강제징병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했던 청년 동주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청년 몽규의 불꽃같은 짧은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청년 윤동주가 찾아간 영화 속의 정지용은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다.”라고.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엄혹한 시대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꽃다운 청년의 절규와 아픔을 잊은 채 오늘을 살고 있는 부끄러운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귀향’은 14살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끌려가 전쟁터에서 성의 노예가 됐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귀향’은 기획에서 제작까지 14년이 걸렸고, 국내외 7만5천여 명의 후원자가 낸 성금으로 제작됐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개봉 8일 만에 18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것은 작년 12월 한일양국이 불가역적이라며 합의한 일본군 위안부협정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며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려는 국민 정서의 표현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겹고 위대한 투쟁을 천박하게 매도하는 일본정부에게 면죄부를 던져준 한국정부의 무능과 일본정부의 파렴치함을 방관해온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의 자각이기도하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삼일절을 앞두고 개봉한 ‘귀향’과 ‘동주’ 두 편의 영화가 역사를 잊고 살아온 우리를 일깨운다. 강압적인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추진,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를 무시한 일방적인 한일정부간의 위안부문제 합의 등 정부가 이끌고 주도하는 강압적인 힘에 의해 동의하거나, 혹은 무관심한 채로 넘겼던 일들에 대해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영화 귀향이 끝나고 엔딩 자막에 끝없이 올라가는 7만 5천여 명의 후원자의 이름이 주는 감동은 영화가 주는 메시지 보다 오히려 더 뜨겁고 가슴 뭉클한 무엇이 있었다. 많은 이들의 후원과 관심, 그리고 영화가 평생을 아픔을 지고 살아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들께 따스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동주의 영향으로 요즘 서점에서는 ‘바람과 별과 시’ 시집 판매 부수가 현격하게 늘고 있고 젊은이들 층에선 페이스 북을 통해 윤동주 시인의 시를 적는 새로운 풍속이 생기기도 하였다.

시대의 아픔을 자신이 지려하고 고뇌하며 그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살아야 했던 ‘윤동주’의 아픔이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하고,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찾을 수 있는 어떤 계기를 갖게 해 준 두 편의 영화에 감사하며 새로운 의미의 97주년 삼일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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