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읍성 복원 축원문
청주읍성 복원 축원문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6.03.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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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청주의 원도심에 굳건하게 서있던 읍성은 오랜 역사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존재였으며 청주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최근에 이르러 청주읍성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실체가 없는 현실에서 읍성을 제대로 알기에는 난제들이 많다. 3년 전에는 성돌모으기 운동도 벌이고 중앙공원 서편의 성벽 35m 구간을 복원하면서 읍성의 옛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시들해졌다. 그래도 매년 9월에 거행되는 청주성탈환축제를 통해 읍성을 추억할 기회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이 축제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부분적으로라도 읍성복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청주읍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신라시대 서원경성(西原京城)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될 것으로 추측되고, 고려시대에는 읍성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석성(邑石城)의 둘레가 1,084보이고, 안에 우물 13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청주읍성에 대한 첫 공식기록인데 이후의 실록과 지리지 고문서 등에 많은 기록이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1.8㎞에 이르고 청남문(남) 현무문(북) 벽인문(동) 청추문(서) 등의 4대문이 있었으며 남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갖추고 있었다. 성안은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 즉 지금의 성안길을 중심으로 동서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는데, 서쪽지역에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 그리고 사창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하였고 동쪽지역에는 주택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의 상당구청 자리에 있었던 청주목 관아는 동헌 건물이 현존하고 있어 옛날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곳은 옛 청주목사가 주재하던 관아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청주군청이 되었고 1946년부터 청원군청으로 사용되다가 청주청원 통합시가 출범하면서 2014년 7월 1일부터 상당구청이 되었다. 많은 시민은 청주청원 통합 후에 군청 건물을 철거하고 관아공원이 조성되길 갈망했다. 효촌리에 상당구청을 신축할 때까지 당분간 한시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니 몇 년 더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구청이 옮겨간 후에는 이유 불문하고 관아공원으로 거듭나서 상처받은 청주의 자존심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갈 데가 없어 중앙공원으로 이전된 망선루도 원래의 위치인 관아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충청도의 육군을 총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의 옛터인 중앙공원에는 병영의 출입문이었던 문루(정곡루)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청녕각(淸寧閣)’ 편액을 엉뚱하게 이 건물에 옮겨 붙인 까닭에 어느 책자에는 관원들이 기생파티를 하던 누정으로 소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청주에서 평생을 살면서 청녕각을 보아왔다는 원로들의 거센 반론을 물리치고 1988년 5월 잘못 걸린 편액을 환원하고 명칭을 되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에게는 ‘응답하라 1988’의 추억이다. 1907년에 병영문 앞에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일이 있고, 1908년에는 비어 있는 병영으로 충북도청을 충주로부터 이전해 1937년 현 도청을 신축할 때까지 30년간 도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사창터에 자리한 청주우체국이 율량동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니 또한 반가운 소식이다. 읍성의 성벽 복원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성내에 있었던 관아와 사창, 충청병영에 딸린 시설들의 위치를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선 이들 역사적인 곳에 표석이라도 세우고 시유지 등 가능한 곳에는 성벽을 복원하고 정 어려우면 쌈지공원이라도 만들어서 성터를 표시하고 여유가 생기면 성문도 세워 청주의 자존심도 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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