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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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일선<교통대바로세우기준비위>
  • 승인 2016.03.0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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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박일선<교통대바로세우기준비위>

보름달에 비친 탄금호가 찬연해 보이는 밤입니다. 선현들은 이곳을 ‘달여울’이라 이름 짓고 ‘옥강’이란 ‘아리수’의 애칭도 만들었죠. 모현정에서 한강 너머 달빛에 꿈틀대는 장미산을 바라보노라면, 새재와 여주가 한 눈에 보이는 성(城)을 두고 삼국이 쟁투하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김형도 달내강에서 올갱이 잡던 때가 있었죠. 요즘처럼 골치 아플 땐 용섬에서 버들피리라도 불고 싶을 겁니다.

굳이 옛날을 말하지 않아도 충주는 일제침략 전까지만 해도 평양에 버금가는 내륙최고 도시였죠. 임진란의 참화로 207년간 유지된 충청감영이 공주로 옮겨가 급속히 쇠락한 듯 보였죠. 하지만 영남과 한양, 내륙과 경기를 연결하는 물길과 뭍길은 충주를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부활시켰죠. 그리하여 용인과 평창도 아우른 충주부의 수부가 되었고 관찰사부와 도청소재지가 되었소. 봉건왕조의 부패와 외세침략에 대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건 동학북접과 호서의병의 중심이 되었죠. 그 보복으로 일제는 충주일대를 초토화시켰죠. 영국 ‘데일리 매일’ 맥켄지기자의 ‘조선의 비극’에 그려져 있죠. 이런 강력한 저항에 위협을 느낀 일제관료 신곡탁남(信谷卓南) 등은 1908년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서류를 싸들고 청주로 도망갔어요. 이것이 도청의 청주이전사건입니다. “청주시민에게는 쌍수를 들고 춤을 추며 환영할 복음…, 충주로서는 흉사를 알리는 종소리”라고 ‘청주연혁지’는 전해요. 연이은 공공기관 청주이전, 충주사범학교의 청주교대로 흡수, 경부축중심 불균형개발로 청주권은 인구 100만명에 이르렀고, 충주는 20만을 지키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죠. 긴 세월 충주의 소망은 고속도로건설과 충주공전의 4년제 대학승격이었죠. 제천을 통과하는 중앙고속도 개설을 보며 충주는 깊은 어둠에서 헤매고 있었죠. 하지만 한강이 변함없이 충주를 거쳐 서울로 가듯, 하늘은 중원을 버리지 않으셨죠. 그것은 ‘공공기관 충청권배제’를 철회시키고 기업도시를 유치한 것이고, 충주공전이 4년제가 되어 청주과학대는 물론 철도대학과 한 몸을 이룬 것이며, 중부내륙고속도에 이어 동서고속도 개통, 강남과 50분대의 준고속철 추진이죠. 중원의 기운이 솟구치는 시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혁신도시의 청주권 강탈이며, 교통대 증평캠의 충북대 흡수시도죠. 이는 충주지도자들이 빌미를 줬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김형, 한강이 큰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동강, 달내강, 섬강을 다 품었기 때문이죠. 모든 만남은 소리가 납니다. 교통대의 뿌리가 됐던 충주사범학교와 청주간전의 옛터에서 그 대지의 신과 대화해 보세요. 전체교수들의 ‘학과통합추인’을 ‘통폐합’으로 왜곡해 폐과한 유아특수교육학과 강의실에서 앉아서 칠판을 보세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적혀 있어요. 중학교 한문에 나오는 말이죠.

일부의 교명변경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수 충주시민이 ‘충주대’ 명칭을 포기하고 ‘교통대’로의 전환을 지지했던 것은 충북대로의 통합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염원에서였죠. 김형은 교통대에서 어떤 총장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충주역사에 어떤 인물로 기록되기를 바라십니까? 산은 오르는 것 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어렵다지요. 하산 준비 철저히 하세요. 그래야 미래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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